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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불교와 북방불교

학자들은 대승불교 사상과 경전이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성립한 『아함경』 등은 지금의 남방불교에서 독송하고 있는 초기 경전으로 분류되고 있다. 이 초기 경전과 대승 경전은 어떤 사상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대원 스님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초기 경전이 성립될 무렵에는 소극적인 수행으로 자아를 닦는 데만 치우쳐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런 소극적인 수행에 있는 게 아니라 대승적인 수행에 부처님 의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초기 경전이나 그 수행법은 소극적인 데 비해 대승 경전의 가르침은 좀 더 적극적이고 대중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세월이 흐르면서 동남아시아 등 남방에서는 소승불교의 전통이 이어진 반면, 동북아시아에서는 대승불교가 발달했다. 그런데 근래에는 우리나라 스님들이 남방의 불교국가로 가서 수행하는가 하면 남방국가의 스님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수행법을 익히고 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나라의 경우 대승불교를 지향해 왔으니까 소승불교의 기초적인 체계를 잘 섭렵하고 다시 대승불교니 소승불교니 하는 데로 빠져들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우리나라에 남방불교 스님들도 찾아와 배우고 우리 스님들이 동남아로 가서 위빠사나(관법) 등을 배우고 있습니다. 초학자로서 관법의 기초를 다지는 것은 중요한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승불교를 너무 지향하다 보니까 그런 기초를 다지는 걸 소홀히 했죠. 그래서 요즘 우리 대승불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그 관법 하는 게 대단한 것인 줄 알고 남방불교권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은 대승불교로 가기 위한 사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인 『금강경』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는 뜻을 가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을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 대원 선사도 이 부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해 준다면 수행자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수행자 본인이 참선을 통해 깨달은 상태로 보아야 계합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만약 계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세히 설명을 덧붙이면 그냥 이론에 그치는 것일 뿐 실질적으로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한마디로 어떤 거냐고 묻는다면 ‘뿌리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 주장자[無根無形拄杖子]이다.’라고 답할 수 있습니다. 또 ‘황금의 광명이 하늘 땅을 덮는다[黃金光明蓋天地].’라고 말하겠습니다. 응무소주라는 것은 자성의 근본체를 말합니다. 또 이생기심이라는 것은 머무른 바가 없는, 즉 성성히 깨어있는 자성체(自性体)를 걸림 없이 드러내어 쓰는 것을 말합니다.” 『금강경』의 핵심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있다면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반야행에 깊이 전념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함을 깨닫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났다’는 구절이 핵심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오온이 공함을 깨닫는 인과 관계는 무엇인가.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실질적인 마음의 지혜로 깊이 비추어 보는 데 있고, 비추어 봐서 확실하게 모든 것이 공함을 체득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체 모든 중생의 견해가 벗어지는 것인데 이 중생의 견해를 벗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쪽 언덕에 해당하는 어리석음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저쪽 언덕에 이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걸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반야 지혜로 일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공한 것을 깨달아 알았을 때 바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러 중생의 세계에서 벗어난 것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을 행한다는 것은 관조(觀照)해 보는 것이고, 공한 걸 체득해서 얻은 것을 반야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스님이 결론 삼아 덧붙인 게송은 다음과 같다. 碧眼穿鐵壁 푸른 눈으로 쇠로 된 벽을 꿰뚫고 石人劍上行 돌사람은 칼날 위를 행함이로다. 그렇다면 이런 대승적인 깨달음을 지향하는 북방불교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계승해 온 남방불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대원 스님의 견해는 이렇다. “대승불교에서는 본래의 자성 부처를 깨닫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과 밖으로 보살행을 실천하는 두 가지를 겸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방에서는 관법(觀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수행을 완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차이라고 봅니다.” 스님의 견해는 이처럼 명확하다. 그럼에도 근래에 많은 스님들이 남방으로 건너가 계를 받고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 등을 익히고 초기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북방의 간화선 수행과 남방의 관법은 정말 근본적으로 다른 수행법일까. “사실 남방의 관법이나 북방의 관법은 똑같이 볼 관(觀)자를 쓰고 있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운을 뗀 후 그런 점에서 ‘관’이라는 자체를 놓고 볼 때 남방이나 북방에는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굳이 차별이 있다면 북방에서 말하는 관이라는 건 지혜(智慧)를 가리키지만, 남방에서는 정수기로 물을 걸러 맑은 물을 만들 듯 관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닦아서 안정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걸 남방에서는 ‘알아차림’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남방에선 지혜를 알아차림이라고 부른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실 남방이나 북방이나 똑같이 알아차림이라고 부르지만 이름만 같을 뿐 그 차원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남방에서는 자꾸 닦고 닦아서 마음의 때를 소진하고 안정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것을 알아차림이라고 부르는데, 북방에서는 언어·문자 밖의 소식을 알아차리는 걸 알아차림이라고 부릅니다. 그게 다른 점이지요.”
학림사 설법전에서 소참법문하시는 학산 대원 대종사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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