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의 정혜결사 운동에도 아랑곳없이 고려의 승가는 고려 말에 이르러 다시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 결과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유학을 숭상하는 반면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런 불교 탄압 정책에 대해 승가나 불자들은 억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적극 저항해야 할 입장이었지만 당시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왕이나 귀족 대신들과 결탁해 부패를 저지르고 타락해 왔던 승가의 업보였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숭유억불 속에서도 왕실과 일부 양반들은 여전히 절에 다니며 기도를 했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초기에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이 부처님의 생애를 그린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비롯한 여러 불서를 간행했다는 점만 보아도 그들의 불심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200여 년간 침체되었던 조선 불교계가 주목을 받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였다. 왜군이 침략하자 국왕 선조(宣祖)의 부름을 받은 서산 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당시 72살이란 나이에도 승병 1,500명을 모아 왜적과 맞서 싸웠다. 아울러 그의 제자 사명 대사 유정(惟政, 1544-1610)과 처영(處英, ?-?) 등이 승군을 지휘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니, 왕실은 물론 일반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서산 대사는 일찍이 『선가귀감(禪家龜鑑)』을 통해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禪是佛心],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敎是佛語].”라고 설파해 선과 교의 특성을 쉬우면서도 간단명료하게 정의했던 당대의 고승이었다. 서산 대사는 이밖에도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와 같은 책을 펴내어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과 가르침을 주었다. 그 중 『선가귀감』은 지금도 여러 한글 번역본으로 출판되어 읽히고 있는 명저이다.
선가귀감(송광사, 1618년 발행)
이처럼 서산 대사와 사명, 처영 등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아 나라를 지키는 데 눈부신 공을 세웠고 그 결과 불교와 승가에 대한 유학자들의 인식을 바꾸고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불교의 수많은 계율 중 첫 번째는 불살생계(不殺生戒)이니 승려가 무기를 들고 왜적을 살상한 것이 부처님 가르침과 부합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과 불살생계 중 어떤 가치를 우선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한국불교의 특성 중 하나로 ‘호국불교(護國佛敎)’를 손꼽는 사람들이 많다. 호국불교란 말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라를 구한다는 뜻인데 고려 때 몽골의 침략을 당하자, 온 백성이 한뜻으로 뭉쳐 팔만대장경을 조성했다든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승병이 일어나 왜적과 맞서 싸운 일을 호국불교의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다. 과연 당시의 의승병들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난 것일까?
실제로 서산 대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격문에는 “……악귀들이 우리 조국을 무참히 짓밟고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는 광란을 벌이니 이 어찌 사람이 할 짓이랴. 살기가 서린 저 악귀들은 독사, 금수와 다를 바 없도다……이제 우리 승병만이 조국을 구하고 백성을 살릴 수 있어…….”라는 대목이 있다.
서산 대사는 왜적을,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하는 악귀로 보면서 조국을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승려들이 의병으로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의승병이 일어난 것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호국불교 사상과 어느 정도 합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원 스님의 견해는 이런 일반적인 평가와는 약간 다르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님은 ‘호국불교(護國佛敎)’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일깨워 주고 있다.
“부처님은 인도 마갈타 국에서 태어나셨지만 그 한 나라나 인도에 국한한 성인(聖人)이 아니고 전 세계, 더 나아가 우주적인 차원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고국 마갈타 국이나 인도를 위해서 사신 분이 아닙니다.
부처님 재세 시에도 많은 이교도들이 불교를 비방하고 또 부처님의 고국 마갈타 국을 침탈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이 가만히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달(調達)이란 사람이 불교를 비방하고 파괴하려고 할 때 부처님은 그를 마구니(마군)로 보고 항복시켰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산 대사나 사명 대사가 조선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단순히 조선을 지키려고 왜적과 싸운 게 아니라 아무 죄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한 왜적들을 마구니로 보고 부처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그들과 맞서 싸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부처님의 자비 사상에서 벗어난 마구니 집단이 양민을 해치는 것은 부처님 진리를 해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차원에서 승병을 일으켜 적과 싸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착각해서 스님들이 나라를 지키려고 왜적과 싸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서산 대사나 사명 대사 등 승병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크게 위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렇게 보지 않으며 승병들이 호국했다기보다는 마구니를 무찔러 불법을 지키기 위해 의승병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 마구니가 대한민국에 있든 중국에 있든 일본에 있든 미국에 있든 간에 스님들은 남을 죽이고 침탈하는 마구니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는 차원에서 싸워야 합니다.
부처님 진리를 세상 모든 중생에게 골고루 펴서 자비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구니의 항복을 받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합니다. 서산 대사 등도 그와 같이 보살심과 자비심으로 무기를 들고 떨쳐 일어난 것이지 단순히 조선을 지키려는 차원은 아니었으리라고 봅니다.”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깊은 자비심과 보살심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조선불교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 뒤 조선 말기에 이르러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경허 선사는 ‘20세기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고 있다. 경허 선사가 생존했던 시기의 조선은 서양 각국과 일본 등으로부터 극심한 개방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영향으로 조선 정부는 1894년 갑오경장을 통해 문벌(門閥)과 신분 계급의 타파, 노비제도 폐지 등 여러 조항을 발표했다.
신분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때까지 팔천(八賤)에 속했던 스님들은 일반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도성(都城) 출입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도성 출입이 허가된 것은 일본인 승려의 건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건 개운치 않은 문제였다.
당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려는 갖가지 술책을 쓰고 있었다. 일본인 승려가 ‘스님들도 도성을 출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건의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서양인들이 아프리카, 아시아를 공략할 때 먼저 천주교나 개신교 성직자들을 파견해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고 자신들의 문화와 종교적인 전통을 전파했던 것처럼 개화기의 일본 승려들도 조선불교를 일본화시키려고 갖은 책략을 부렸다.
당시 대다수 조선인 승려들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도성을 출입할 수 있게 해 준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이런 기막힌 모습을 본 경허 선사는 “나는 절대 경성 땅을 밟지 않기로 서원을 세웠다.”고 선언했고 이 말을 열반할 때까지 실천했다.
경허 선사의 의지와 애국심은 이와 같았지만 파계로 보이는 행위를 한 것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한쪽에선 깨달음을 얻은 경허가 계율을 뛰어넘는 무애행을 펼친 것이라고 옹호하는 데 비해 다른 한쪽에선 파계하여 후학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깨닫지도 못한 수행자들이 ‘경허 스님의 막행막식을 따라 한 것뿐’이라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걸 나쁜 영향의 예로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대원 스님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혹자는 ‘경허 스님께서 막행막식을 한 것이 불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거리가 먼 게 아니냐?’라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승적인 작은 안목에서 판단하는 말입니다. 경허 스님께서는 대선지식으로서 중생을 교화하려는 보살심으로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대승보살의 정신을 실천하신 분이 바로 경허 선사라고 나는 봅니다.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그로 인해 이 땅에서 끊어진 선맥을 이어주셨고 또 깨달은 입장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데 있어 대승적인 보살행도 함께 하신 분으로 평가를 합니다.”
경허 선사는 말년에 함경도 삼수갑산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살다가 1912년에 입적했다. 그는 수월(水月, 1855-1928) 선사, 혜월(慧月, 1861-1937) 선사, 만공(滿空, 1871-1946) 선사와 같은 걸출한 제자들을 두었는데 그들의 지극한 수행과 가르침으로 인해 한국 선불교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선사들이 줄곧 배출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경허 선사의 가르침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제자들이라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기에 경허 선사를 일컬어 근대 한국 선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운 중흥조라 부르고 있다.
경허는 깨달음을 얻은 선사였지만 부처님 가르침인 교에도 밝았다. 훗날 그는 선과 교는 하나이니 함께 닦고 익히라며 선교겸수(禪敎兼修)를 강조했다. 따라서 경허 선사로 인해 조선의 통불교가 확실히 복원되었다.
대원 스님은 서산 대사가 선교겸수를 강조하여 통불교가 이뤄졌지만 그 후 100여 년 넘게 선맥이 끊어졌다고 말한다.
“선불교가 사라지고 보니 조선불교는 절마다 스님들이 염불이나 하고 기도나 드리는 등 기복불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경허 스님이 나타나셔서 조선의 선맥을 살려놓으셨습니다. 선이라는 게 불교의 골수인데 그 골수를 되살려서 복원하신 분이 바로 경허 스님입니다.”
대원 스님은 이처럼 ‘경허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의 골수인 선맥을 되살려 놓은 게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경허 선사가 선교겸수를 강조함에 따라 조선불교는 잃어버린 골수를 되찾고 통불교가 정착될 수 있었다며 그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경허 선사
· 집필자 : 이정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