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학림사 창건에 얽힌 기이한 인연

지금의 학림사는 1986년 대원 스님이 대웅전과 조실채를 짓기 시작해 해를 거듭할수록 규모를 넓혀나갔다. 1995년에 상선원인 오등선원을 완공했고 한‧일 월드컵을 한 해 앞둔 2001년에는 하선원인 오등시민선원을 갖춰 공주, 대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간화선 수행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면 누구나 찾아와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2012년에는 학림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설법전 1, 2층과 지하층을 완공했으며 2016년에는 회성당, 2018년에는 대적광전을 완공했다. 2021년에는 2층까지 완공된 설법전을 다시 3층과 4층까지 높여 장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년 뒤인 2023년에는 일주문까지 완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스님이 처음 학림사를 창건한 데에는 여러 가지 기이한 인연과 오랜 전생 동안 쌓아둔 공덕의 힘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다. 그 내력은 이렇다. 1984년도에 불국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마친 스님은 이듬해에 법주사 복천선원에서 하안거에 들어갔다. 석 달이 지나 음력 7월 15일 하안거를 마친 뒤로는 한동안 포행 겸 휴식을 얻기 위해 길을 떠났다. 이른바 만행(萬行)이었다. 그때 스님은 계룡산을 등산해 갑사로 넘어갈 생각으로 공주 학봉리에 이르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연실사라는 절에 들러 차를 한 잔 얻어 마시고 난 후 계룡산 골짜기를 넘어가려고 오솔길에 접어들었는데 마침 어떤 노파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걸어 땀이 났던 스님은 그 밭 가에 있는 감나무 밑에 잠시 걸망을 내려놓고 쉬려고 했다. 그때 한 노파가 다가와서는 반갑게 인사를 했는데 마치 오랫동안 스님이 나타나길 기다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밭과 주변의 땅이 매우 좋고 앞으로 많은 불제자들을 키워낼 장소이니 그곳을 구매하라고 노파가 적극 권하는 내용이었다. 선방 수좌인 대원 스님에겐 그때만 해도 어딘가에 절을 지으려는 생각도 없었고 설령 창건하려고 해도 그럴만한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그럼에도 스님이 사방을 돌아보니 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노파가 있는 곳으로 눈길을 던졌더니 그 짧은 순간에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계룡산을 지키는 할머니 산신이라고 했다. 그날 스님은 참 별일도 다 있다고 여기며 이윽고 갑사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평소처럼 정진하려는데 가사 장삼을 수한 웬 노스님이 나타나서는 아까 계룡산 산신이 말한 대로 절을 짓겠다는 원력부터 세우라고 분부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스님은 ‘이 노스님은 대체 어떤 분일까?’ 하고 의문에 잠겼다. 그런데 노스님은 현장에 다시 가 보자며 대원 스님의 손을 잡고는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 낮에 보았던 절터로 날아가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여긴 천하의 명당이며 앞으로 공부인이 무수히 나올 자리이니 이곳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후학들을 길러내시오.”라고 말했다. 대원 스님이 수긍하면서도 노스님께 여쭸다. “그런데 노스님께선 법명이 어찌 되시는지요?” “내 이름을 굳이 알 것은 없으나 사람들은 자장이라 부르기도 하고 도선이라 부르기도 한다오.” 노스님은 그렇게 답하고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스님은 이튿날 아침에 절에서 내려가 전날 노파를 만났던 동네의 부동산을 찾아가 그 밭의 주인을 물색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땅은 이미 사흘 전에 팔렸다는 게 아닌가. 스님은 낙심했지만 신비한 일들을 거듭 겪은 뒤라서 그 땅을 새로 샀다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만났다. 그러고는 본래 가격이 평당 7만 원이었지만 12만 원 밑으로는 팔지 않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때 스님은 그 땅을 꼭 매입하고 싶었지만 가지고 있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스님은 문득 하안거 때 대중공양을 와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며 전화번호를 남기고 간 ‘보덕화 보살’이 떠올랐다. 그래서 수첩을 뒤져 보덕화 보살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했다. 그 결과 계룡산 산신과 처음 만났을 때의 밭 293평을 매입한 뒤 그 땅에 학림사 대웅전과 조실채를 짓게 되었다. 그게 학림사가 대가람으로 성장하게 될 출발점이었다. 스님들이 절을 짓고 법회를 열거나 수행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은 그 자체가 공덕이 무한한 포교인 셈이다. 『천수경』에 나오는 ‘원아승복변장엄(願我勝福遍莊嚴)’이란 구절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대원 스님의 포교는 제석사 터에 있던 293평을 매입하고 대웅전을 장엄하는 불사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학림사 창건 당시
학림사 대웅전을 세우고 난 대원 스님은 도량을 차츰 넓혀가면서 공부하는 수좌들을 위한 오등선원(五燈禪院, 학림사 상선원)을 세웠다. 선사가 선원을 짓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게 쉽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선원을 짓고 보니 전국의 선방 수좌 스님들 40-50명 정도와 일반 신도들까지 모여 해마다 하안거와 동안거 수행을 하게 되었다. 오등선원을 개원할 무렵 수좌들은 대원 스님을 학림사 조실로 추대하였다. 그때부터 대원 스님은 선방 스님들과 함께 정진을 계속해 오고 있다. 본래 스님이 사들인 땅에는 제석사라는 고찰이 있었다고 한다. 제석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학림사 불사를 할 때 수많은 기왓장이나 그릇 등 유물이 발굴됨에 따라 그곳에 제석사가 있었다는 게 분명히 밝혀졌다. 다만 그때만 해도 문화유산에 대한 관념이 별로 없던 때여서 대원 스님은 그 기왓장 등을 공사하던 인부들에게 나눠주고 따로 보관하지는 않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조선 후기에 제석사가 있던 자리에 마을의 속인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본래 그 자리는 동쪽으로 혈이 떨어지는 곳이라 동향으로 건물을 지어야 했지만 마을 사람들의 주장을 따라 남향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게 문제였는지 그 집에 아기 장수가 태어났다. 옛날에 아기 장수가 태어나면 장차 나라의 역적이 된다는 이유로 삼족을 멸하고 집도 모조리 불태워 없애 나라의 후환을 막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 제석사 터에 태어난 아기 장수와 그의 부모들은 죽임을 당했고 그 집은 소실되었다는 전설이 남은 것이다. 그런 터이다 보니 스님이 만행에 나섰을 때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을 겪으며 그 자리에 학림사를 세우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학림사 대웅전과 상선원
· 집필자 : 이정범

관련자료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