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대원 스님은 묘관음사 선방에서 한 철 지낸 뒤 대각사에 계시는 고암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스님, 그간 잘 계셨습니까? 저는 묘관음사에서 한 철 살고 왔습니다.”
“그래? 향곡 스님은 무슨 말씀을 어떻게 하시던가?”
대원 스님이 묘관음사에서 수행할 때는 조실이던 향곡(香谷, 1912-1978) 스님과 조주선사의 적양화(摘楊花) 공안을 두고 문답을 나눴다. 선사들은 무심하거나 속박을 벗어나 무애자재한 모습을 ‘적양화’라고 표현한다.
한 제자가 조주선사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스님, 저는 이제 가겠습니다.”
이때 조주선사가 말했다.
“부처님 계신 곳에는 머물지 말고, 부처님 안 계신 곳은 빨리 지나가서 3천 리 밖에서 사람을 만나거든 잘못 이야기하지 말라.”
이런 분부를 받은 제자가 말했다.
“스님, 그러면 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에 조주선사가 말했다.
“적양화, 적양화로다.”
이 적양화 공안을 두고 향곡 스님은 “조주선사가 이때 적양화라고 말한 뜻이 무엇이냐?”고 대원 스님에게 물었다. 대원 스님이 답했다.
“금강역사는 섬돌 아래 앉아 있는데 신령스러운 거북이는 불 속을 달립니다.”
이러자 향곡 스님은 매우 기뻐했다.
묘관음사에서 향곡 스님과
대원 스님은 이때의 일을 고암 스님께 그대로 말씀드렸다.
“그래, 잘했구나. 대원 수좌가 선방에서 헛밥은 먹지 않았으니 내가 아주 흡족해.”
은사스님께 이런 칭찬을 받고 난 대원 스님이 여쭸다.
“저는 그렇게 답변했지만 스님께선 적양화에 대한 소식이 어떤 건지 한 말씀 해주십시오.”
고암 스님이 답했다.
“눈동자 안의 사람이 수 놓은 꽃신을 신었느니라.”
1986년, 대원 스님은 대각사에 계신 고암 스님께 인사를 올리러 갔다. 그런데 고암 스님이 그 자리에서 대각사 모든 대중이 동참한 가운데 전법의식을 치르고 가사를 전수했다.
그날 고암 스님은 해인사, 범어사, 신흥사 중 대원 스님이 원하는 사찰이 있으면 어느 곳이든 주석하며 대중들에게 법을 전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하지만 당시 대원 스님은 공주 학림사 불사를 하던 때였다. 그래서 그 말씀을 고암 스님께 드렸더니 직접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얼마 후 고암 스님은 학림사 불사 현장을 보고는 “이 자리가 정말 좋구나. 여기엔 선방을 지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미국 다녀와서 여긴 선방으로 쓰고 자네를 데리고 해인사로 갈 거야.”라며 흡족해 했다.
하지만 고암 스님은 미국 여행 중 교통사고가 났다. 타고 가던 승용차가 흑인이 운전하던 트럭에 받치는 사고였다. 사고 당시 고암 스님은 겉으로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지만 귀국 후 정밀검사를 받아본 결과 뇌출혈로 혈관이 터져 많은 피가 뇌에 고인 상태였다. 그로 인해 급히 서울대 병원으로 입원하였다.
대원 스님이 자운 스님 등 스님들 몇 분과 함께 문병을 갔다. 고암 스님은 말을 하지 못했고 다만 눈빛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대원 스님이 여쭸다.
“스님께서는 임종에 당해서 생사 없는 도리를 한번 보여주십시오.”
고암 스님은 주먹을 번쩍 들어 보였다.
“스님, 이거 말고는 없습니까?”
이번엔 한쪽 다리를 들어 보이고 눈동자를 한 번 굴린 뒤에 다리를 거두셨다. 그걸 보고는 대원 스님은 “예.”하고 큰절을 드렸다.
그야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언어를 초월한 선문답이 이뤄졌다. 교는 부처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 마음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선은 언어를 초월해 마음과 마음을 전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원 스님은 스승의 손과 다리의 움직임을 통해 그 마음을 알아냈고 큰절로 감사를 드렸다.
그 뒤 대원 스님 등 제자들은 고암 스님을 해인사 용탑선원으로 모셨는데 얼마 후 고암 스님은 그 용탑선원에서 입적했다.
대원 스님에게 고암 스님은 은사이면서 법을 물려준 스승이었다. 대원 스님은 스승에 대해 ‘선에 대한 안목이 투철한 데다가 밖으로 교학에 대해서도 밝고 보살행을 할 수 있는 자비심까지 겸해서 역대 어느 선지식보다 아주 특출한 것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추앙했다.
고암 스님
· 집필자 : 이정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