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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교를 겸비한 고봉 스님

대원 스님은 고봉 스님께 『서장』과 『선요』를 처음부터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남장사에서 배울 때와는 달리 자신의 문리가 트이고 실력이 부쩍 느는 것을 느꼈다. 그 시절 대원 스님에겐 깊은 고민이 있었다. 당시엔 학인 30명이 모두 큰 방에 모여 자야만 했다. 학인들은 모두 저녁 9시면 취침에 들었다. 하지만 대원 스님은 저녁마다 고봉 스님의 방으로 들어가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고봉 스님의 다리를 주물러드려야 했기에 다른 학인들처럼 낮에 배운 경전을 복습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만약 복습을 하려면 고봉 스님이 완전히 잠에 드신 것을 확인한 뒤 학인들이 자는 큰방으로 들어가 몰래 불을 켜고 경전을 보아야 했다. 하지만 다른 학인들의 취침에 방해가 될까 봐 불을 켤 수도 없었고 복습할 시간도 없었다. 그러고는 새벽 2시 5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예불에 동참해야만 했다. 일과 중에 『서장』 등 경을 배울 시간이 되면 고봉 스님은 학인들에게 전날 배운 대목을 외워보라고 시키셨다. 하지만 그걸 외울 틈이 없었던 대원 스님은 번번이 야단을 맞았다. “다른 사람은 다 외우는데 넌 왜 입을 다물고 있느냐?” 이런 일이 날마다 반복되자 대원 스님은 걸망을 메고 고봉 스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다. “스님, 저는 다른 강원으로 가겠습니다.” 이에 고봉 스님이 떠나려는 이유를 물었고, 대원 스님은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고봉 스님이 말했다. “내가 강의하는 것을 너도 다 들었는데 어딜 가서 무엇을 더 배운단 말이냐? 그리고 특별히 내가 너를 가까이 불러 안마를 해 달라고 시킨 것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가까이 너를 두고 좋은 법문을 한마디라도 더 가르쳐주기 위함이었다. 너와 내가 거리가 없어야 진정한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격의없이 하나가 되는 상태로 네게 중요한 법을 가르쳐 주려고 가까이 있게 한 것인데 어째서 그런 걸 모른단 말이냐?” 고봉 스님의 말씀을 듣고 난 대원 스님은 그동안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며 참회하고는 청암사에 머물며 경전과 선학을 함께 공부했다.
청암사
그러던 어느 날, 고봉 스님이 학인들에게 말했다. 절 살림살이가 궁핍하니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답한 학인만 가르치고 나머지 학인들은 다른 절로 보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윽고 학인들이 모두 큰방에 모이자, 고봉 스님은 먼저 『선요(禪要)』의 사구게를 낭송해나갔다. 海底泥牛含月珠 바다 밑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아나고 巖前石虎抱兒眠 바위 앞 돌 호랑이 새끼 안고 졸고 있네. 鐵蛇鑽入金剛眼 쇠로 된 뱀이 금강의 눈 뚫고 들어가는데 崑崙騎象鷺鷥牽 코끼리 탄 곤륜을 해오라기가 끌고 가누나. “이 네 글귀 가운데 능히 죽이고 살리는 1구가 있다. 어느 것이 1구이겠느냐?” 고봉 스님이 학인들에게 차례대로 묻자 모두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고봉 스님은 맨 끝에 있던 대원 스님에게 물었다. “대원아, 이제 네가 한마디 해 봐라.” 대원 스님은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고봉 스님께 삼배를 올린 뒤 손뼉을 세 번 치고는 뒷걸음질을 한 다음 서서 말했다. “스님께서 네 글귀 가운데 1구가 있다고 하시니 저는 이런 방법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대원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고봉 스님은 강사였지만 선에 대한 가르침은 여느 선사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 고봉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던 대원 스님의 그릇도 천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봉 스님의 까다로운 질문에 아무 망설임 없이 답한 것은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타고난 선기(禪機)가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그만큼이라도 할 수 있다니 대단하구나. 너밖에 없다. 넌 여기 머물며 공부 열심히 하거라.” 그렇게 대원 스님은 청암사에 계속 머물며 더욱 열심히 경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출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참선 수행에 전념했지만 틈나는 대로 경전을 수지독송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님은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금강경』에 가장 마음이 기울었고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금강경』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며 선과 교가 곁들여진 내용을 갖추고 있어 불자들에게 매우 중요시된다. “『금강경』에는 우리 중생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일깨우는 그 한마디에 깊은 도리가 있다.”고 대원 스님은 평한다. 그리하여 『금강경』을 독송할 때마다 어떤 확신과 말할 수 없는 환희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금강경』에는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네 개의 사구게(四句偈)가 있는데 스님은 그 중에서도 제1 사구게인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를 가장 중요한 부처님 말씀으로 여기고 있다.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는 뜻이다. 스님은 이 제1 사구게와 함께 제2 사구게에 담긴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을 부처님이 말씀하신 최상의 일구라고 강조한다.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뜻의 이 구절은 『금강경』의 핵심이면서 여러 번 반복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만큼 『금강경』의 핵심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6조 혜능(六祖惠能, 638-713) 스님도 이 대목을 듣고 크게 느끼는 바가 있어 황매산(黃梅山) 오조사(五祖寺)에 머물던 5조 홍인(弘忍, 602-675) 대사에게 출가했다. 대원 스님은 혜능 선사에 대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란 구절을 듣고는 그게 최상의 진리라는 걸 깨닫고 부처님 진리에 계합되는 삶을 살았던 스승”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혜능 선사 이전의 조사스님들도 이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대해서는 1구도 벗어난 일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조사스님들이 밖으로 여러 가지를 드러냈지만 그 바탕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응무소주 이생기심’에 있으며 그 말씀에서 절대 벗어난 바 없었다는 견해이다.
청암사 강원의 고봉 스님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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