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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백에게 배운 경전 공부

대원 스님은 출가 후 줄곧 행자 생활을 하다가 사미계를 받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남장사에는 교학을 강의하는 청봉 스님이 있었기에, 대원 스님을 강원이 따로 있는 사찰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사이신 청봉 스님이 나라에서 가장 실력이 좋고 훌륭한 강사스님인 줄로만 알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통도사에서 강원을 마친 재용 스님이 상주포교당의 포교사로 부임한 뒤 남장사로 인사차 들렀다. 그때 재용 스님이 대원 스님에게 무슨 과목을 공부하는지를 묻고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란 글자를 한자로 적어 주며 청봉 스님에게 그 뜻을 물어보라고 했다. 청봉 스님은 엉뚱하게도 그 한자의 훈대로 ‘차가운 산에서 주워 얻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해주었다. 그러자 재용 스님은 그건 각각 문수보살, 보현보살의 후신으로 알려진 성인(聖人)의 이름이라며, 더는 재용 스님에게 경전이나 선어록을 배워선 안 될 것이라고 충고해주었다. 그 일로 청봉 스님을 최고의 강사스님으로만 알았던 생각이 차츰 달라졌다. 하루는 『서장(書狀)』을 배우던 중 청봉 스님이 인명(人名)인 ‘주세영(朱世英)’을 ‘꽃부리를 영세에 드날린다’라고 새기는 걸 듣고는 “스님, 주세영은 사람 이름이 아닙니까?”라고 여쭸다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그 일을 우연히 주지스님이 알게 된 후로 청봉 스님은 남장사에서 말없이 떠나고 말았다. 대원 스님은 1962년, 직지사에서 동산 혜일(東山慧日, 1890-1965)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비구계)를 받았다. 7증사(證師)로 효봉 스님을 비롯해 청담 스님 등 큰스님들이 모두 참석하여 보살계와 비구계를 함께 주는 자리였다. 그날 전계화상(傳戒和尙)이던 동산 스님은 구족계를 내린 뒤 대원 스님의 머리를 만지면서 “너는 골상이 잘 생겼구나. 앞으로 도인이 되겠다.”고 축하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동산 혜일 스님
대원 스님은 출가한 지 6년 만에 남장사를 떠나 김천 청암사(靑巖寺)로 갔다. 어떤 스님이 청암사에 훌륭한 강사스님이 계시니 찾아가 공부하라고 권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때 청암사에는 백용성 스님의 제자로서 해인사와 은해사 등에서 강사를 역임한 고봉(高峰, 1901-1967)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학인들과 함께 고봉 스님의 제자들인 우룡(雨龍)‧고산(杲山) 스님도 있었다. 하지만 고봉 스님에게 『선요(禪要)』를 배우기까지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장사의 주지스님이 미리 편지를 보내, 대원 스님이 찾아가면 받아주지 말고 도로 남장사로 보내달라고 청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고봉 스님은 배움을 위해 자신을 찾아온 학인을 돌려보낼 수 없다며 대원 스님을 받아주었다. 고봉 스님은 대원 스님을 시자로 삼아 한방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런데 대원 스님은 그 생활이 싫었다. 낮에 경전 공부를 했으니 밤에는 책을 펴놓고 복습을 하고 싶었는데 고봉 스님 다리를 주물러드리랴, 이런저런 시중을 들랴 좀체 짬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청암사를 떠나기로 했다. 그러자 고봉 스님이 말했다. “나는 네 근기가 다른 사람보다 수승하다고 봐서 네게 최고의 진리 법을 가르쳐주려고 가까이 있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하늘처럼 여긴 나머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지만 너는 내가 가까이 두고 있으니 너와 나 사이엔 아무런 거리가 없지 않느냐? 거리감이 없어야 가장 공평하고 친절하게 진리를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인데 너는 어째서 내 뜻을 모르느냐?”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밤에 고봉 스님 다리를 주물러드리는 게 오히려 즐거웠다. 그 무렵 청암사에서는 학인들이 강사스님에게 매달 쌀을 한 말씩 보시해야만 했는데, 한 달이 가기도 전에 쌀이 떨어지고는 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고봉 스님이 학인들에게 말했다. “쌀이 금세 떨어지니 이 절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건 무리일 것 같다. 그러니 내 질문에 대답을 못 하는 학인은 이 절을 떠나는 것으로 하자.” 자신의 강의를 들을 사람을 가리는 자격시험을 보겠다는 말이었다. 이어서 학인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고봉 스님의 시험이 시작되었다. “『선요』에 고봉 원묘(高峰圓妙, 1238-1295) 스님의 사구게 중에 1구가 있고, 그 1구를 바로 알면 일생의 참선을 다해 마쳤다고 하리라는 말이 있는데 그 1구가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 학인 중 유일하게 대원 스님이 답을 드렸다. 그 결과 고봉 스님의 칭찬을 받고 청암사에 계속 남아 『선요』와 『서장』을 모두 배웠다. 이후 통도사 강원으로 가서 호경 스님에게 『원각경』과 『기신론』을 공부했다. 몇 년 뒤 출가 본사인 남장사로 찾아갔다. 그때 남장사에서는 순천 선암사에 계시던 석롱 스님을 초빙한 터라, 석롱 스님에게 『도서』와 『절요』, 『기신론』을 배웠다. 석롱 스님은 일본에서 불교학을 배운 대처승으로, 강의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이후 남장사의 혼해(混海) 스님에게 『금강경』과 『화엄경』을 배웠으며 선학(禪學)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혼해 스님은 일찍이 금강산 장안사에서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해방되기 전 해인사에서 조실을 지낸 강사이자 선사였다.
가운데 앉아 있는 분이 고봉 스님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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