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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으로 버틴 행자 시절

상주에는 ‘사장사(四長寺)’로 일컬어지는 사찰들이 있다. 사장사란 남장사와 북장사, 갑장사 그리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승장사를 통칭한다. 그중 노악산(露嶽山) 중턱에 있는 남장사는 신라 때 진감국사(眞鑑國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832년(신라 흥덕왕 7)에 창건한, 천년이 넘는 고찰이다. 건축물로는 일주문을 비롯해 극락보전과 보광전, 관음전, 주지실, 강당, 요사채 등이 있다.
남장사 보광전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남장사로 무작정 찾아간 대원 스님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출가하려고 왔다고 하니, 남장사 주지인 월호 스님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나 출가 수행자가 되는게 아니다. 그러니 넌 집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출가를 결심한 터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절 마당과 법당 안을 서성이며 계속 기다렸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어 대중 스님들이 모두 공양을 했지만 대원 스님은 밥을 굶어야 했다. 누구도 점심 공양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심을 굶으면서까지 절 마당을 떠나지 않자, 주지스님이 보고는 아직도 안 갔느냐고 물었다. “저는 스님이 되려고 왔으니 절대 안 돌아갈 겁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원주스님을 불러 말했다. “저 아이가 꼭 출가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네가 데리고 있으면서 잘 가르쳐 보아라.” 대원 스님은 그렇게 출가를 허락받았다. 본래 남장사 주지 월호 스님은 오랫동안 참선 수행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교학에도 밝았으며 계율이 청정한 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대원 스님은 비구계를 받기 전까지 주지스님으로부터 혹독한 단련을 받아야 했다. 대원 스님은 주지스님의 분부로 원주실에서 지내면서 공양주 소임을 맡게 되었다. 속가에서 지낼 때 밥 한번 해 본 일이 없었는데 남장사 대중은 물론 참배객들 수십 명의 밥을 짓게 되었으니 그것부터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냥 들기에도 무거운, 쇠로 만든 양동이에 쌀을 담아 나르는 일부터 했다. 그 양동이가 워낙 무겁다 보니 역도 선수가 하는 동작처럼 일단 양동이를 배에다 걸친 뒤 다시 들어 올려 큰 가마솥이 있는 곳까지 옮긴 다음 씻은 쌀을 붓고는 밥을 지었다. 많은 대중이 드나들다 보니 주지스님에게 받은 쌀로 닷새 동안 밥을 짓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남장사 주지스님은 쌀 두 말을 내주고는 닷새를 채우라고 했다. 그런데 절을 찾는 참배객과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많았고 게다가 그 숫자가 날마다 들쭉날쭉하다 보니 두 말을 가지고 정해진 날짜를 채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결과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쌀을 새로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사흘 만에 쌀을 받으러 가니 주지스님이 쌀을 내어준 날짜를 적은 공책을 보며 야단을 쳤다. 그러면서 훔친 쌀을 가져오라고 다그쳤다. 쌀을 훔치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어른한테 말대꾸한다고 꾸중했다. 그러니 쌀을 타낼 때까지 문밖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하 15도쯤 내려간 한겨울에 그렇게 야단을 맞으며 서 있기를 10분, 20분쯤 지나선 발이 저리고 아프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30분쯤 지나서는 다리가 칼로 쑤신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한 시간 반쯤 지나서는 아예 통증마저 없어졌다. 주지스님은 그렇게 벌을 세운 뒤에 말했다. “오늘은 밥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쌀을 내주겠지만 다음에 올 땐 감춰 둔 사흘 치 쌀 가져와야 한다. 알았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상책이라 일단 “예!”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새로 쌀 두 말을 받았지만 ‘이것으로 닷새 동안 어떻게 밥을 짓나?’ 싶어 온갖 걱정이 앞섰다. 화두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푸는 게 화두였다. 한 번에 30명이나 50명의 밥을 지으려면 의도치 않게 눌은밥이 생긴다. 절에 찾아오는 여러 대중들에게 밥을 퍼주고 나면 정작 자신이 먹을 밥은 남지 않았다. 그럴 때 눌은밥이라도 먹기 위해 솥단지를 드르륵 긁다 보면, 어느새 다가온 주지스님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렇게 혼이 나서 줄행랑을 쳤다가 시간이 제법 지난 뒤에 다시 공양간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가마솥의 누룽지는 하나도 남지 않았기에 점심은 굶기 일쑤였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밥을 짓는 데 따르는 몇 가지 과제를 풀고자 했다. 그 과제란 밥을 질지도 않고 되지도 않게 지으며, 쌀을 잘 일어 돌이 들어가지 않게 하고, 누룽지가 생기지 않게 밥을 잘 짓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하루는 쌀을 받으러 주지실로 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쌀을 내달라고 하면 주지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하니 좀체 다가설 수가 없었다. 주지실 앞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리고, 다시 갔다가 돌아서고 하기를 다섯 번이나 반복하다가 마침내 큰 용기를 내어 주지스님께 청했다. “스님, 쌀이 떨어져서 쌀 내러 왔습니다.” 역시 주지스님은 닷새도 안 되어 쌀을 받으러 왔다며 몹시 나무랐다. 그러고는 속가로 편지를 보내 절에서 숙식한 비용을 모두 보내라고 부탁하든가 아예 집으로 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대원 스님은 그런 곤란을 겪으면서도 절에서 절대 안 나가겠다고 버텼다. 주지스님은 하는 수 없다며 그에게 다시 쌀 두 말을 내줬다. 그렇게 받은 쌀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지스님께 큰절을 거듭 올려 참회했다. 그 모습을 본 주지스님이 무엇을 참회하는가를 물었다. “어른이 지시를 내린 것은 그대로 지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래서 참회합니다.” “아둔한 놈이로군. 네 머리가 나쁘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이제라도 잘못했다고 참회를 하니 내가 한번 봐준다.” 쌀을 배급받는 문제는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하루는 주지스님이 제사상을 차린다며 지시했다. “여기 사라 가져오너라.” 대원 스님은 ‘사라’가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섭기만 한 주지스님께 그게 뭐냐고 여쭙지도 못했다. 그렇게 했다간 ‘이 소같이 미련한 놈’하고 혼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작정 주방으로 뛰어가 목판이며 컵, 밥그릇 등을 닥치는 대로 가져갔다가 번번이 야단을 맞았다. 나중엔 당시 한창 외우고 있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생각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면서 기운이 났다. 대원 스님은 빈손으로 주지스님 앞으로 다가가 “스님, ‘사라사라 시리시리’할 때 사라를 찾는 게 아닙니까?”라고 여쭸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더욱 꾸짖었다. 여섯 번째로 주방으로 뛰어가 커다란 접시를 들고 갔더니 주지스님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비로소 주지스님이 찾는 ‘사라’가 그 접시를 가리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처럼 행자 시절은 처음부터 고난과 인욕의 연속이었다. 동해사 주지스님이 말한 대로 절에 출가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이 귀에 박힌 데다 어려서부터 스님들이 좋아 절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래서 주지스님에게 걸핏하면 야단을 맞고 심지어 매까지 맞아가면서도 절 밖으로 나갈 생각은 털끝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 모든 역경을 참아가며 인욕의 세월을 보냈다.
출가 시절
· 집필자 : 이정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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