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 대원(鶴山大元) 대종사는 1942년 4월 27일(음력 3월 13일)에 지금의 경북 상주시 서곡동에서 태어났다. 풍양(豐壤) 조씨(趙氏) 가문인 아버지 조봉구, 어머니 이달식 사이의 5형제 중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늙은 용이 승천하는 태몽을 꾼 뒤 스님을 낳았다고 전한다. 대원 스님이 출가하기 전까지 썼던 이름은 남희(南熙)이다.
풍양 조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이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한 조맹(趙孟)이다. 풍양은 지금의 경기도 양주와 남양주 일대를 일컫던 옛 지명으로 시조인 조맹의 후손들이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고 그중 상주 지역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현재 남양주시 천마산에는 조맹이 왕건과 만났던 자리에 지어진 견성암(見聖庵)이란 사찰이 있다.
아버지 조봉구 거사는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한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덕분에 스님도 어려서부터 한학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어머니 이달식 보살은 부잣집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어려움 없이 성장해 조봉구 거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한때 아버지는 땅을 팔아 서울로 올라가 사업을 했지만 1년도 안 되어 실패하고 낙향하였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그런 일에 대해 조금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유교적 예법에 따라 자녀들을 엄하게 키웠다고 한다. 그런 영향으로 형제들은 상주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답게, 누가 보더라도 양반의 자손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예의범절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예법이 철저했는데 이를테면 식사 시간에 아버지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들 형제들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처럼 엄격한 가부장 제도가 유지되고 있던 가운데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께 스님이 여쭸다. 그날은 하교한 뒤 아버지를 도와 밭을 매던 중이었다.
“아버진 어쩌다가 서울로 올라가셨다 사업에 실패하셨습니까?”
“서울엔 말이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눈 뜨고도 코를 베어 갈 사람들도 많았는데 내가 하필 그 사기꾼들을 만나 사업에 실패한 것이다.”
고려 때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대원 스님이 일찌감치 출가한 것은 어려서부터 몸이 아프고 허약했기 때문이다. 네다섯 살 무렵 어느 날, 갑자기 몹시 아파진 스님은 급히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으로 갔으나, 의사는 그 병을 고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급한 마음에 한의원으로 찾아갔지만 거기서도 고칠 방법이 없다며 집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장도리로 당신의 손가락을 쳐서 피가 흐르게 하고는 그것을 스님의 입속으로 넣어 삼키게 했다. 그 지극한 수혈이 효과가 있었는지 겨우 정신이 돌아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도 항상 몸이 부실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동해사(東海寺)를 찾게 되었다. 상주 식산(息山)에 있는 동해사는 고려말,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어머니는 그 절의 신도였다. 어머니는 동해사로 가는 날이면 겨울철이라 해도 얼음장을 깨고 목욕재계를 할 정도로 신심이 깊으셨다.
동해사
그날 동해사로 간 어머니가 주지스님께 여쭤보았다.
“남희가 늘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병원이나 한의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고 하니 어쩌면 좋겠습니까?”
“저 아이는 속세에 있으면 명이 짧아 21살밖에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꼭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절에 출가하여 수행하면 수명도 길어지고 도를 통해 만인을 제도하는 훌륭한 선지식이 될 겁니다.”
당시 대원 스님은 방문 밖 툇마루에 앉아 어머니와 주지스님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절에 출가시켜야 한다는 말에 어머니가 다시 여쭸다.
“스님, 출가시키지 않고 속세에서 지내면서 장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에 동해사 주지스님이 분명한 어조로 답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속세에서는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고작해야 21살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
그날 어머니는 동해사 주지스님에게 들었던 말에 대해선 어느 누구에게도 일절 털어놓지 않았다. 출가해야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을 직접 들은 대원 스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넷째 아들 남희가 건강하게 오래 살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차마 출가하란 말을 할 수 없었던 지극한 모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원 스님은 전생에 불법(佛法)과 인연이 깊었던지 동해사를 찾아가기 전에도 길가에서 스님들을 보면 무작정 따라가고는 했다. 등교하던 중에도 먼발치에 어떤 스님의 행색이 보이면 한참 따라가다가 학교에 지각하여 혼이 난 적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넌 어째서 날 자꾸만 따라오는 것이냐?”
“저도 스님처럼 출가하고 싶어 그럽니다.”
그 스님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보아하니 넌 아직 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토록 출가하고 싶으면 학교나 마치고 절을 찾아가야 출가할 수 있단다.”
그 뒤 스님은 초등학교 졸업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졸업하자마자 바로 상주 남장사(南長寺)를 찾아갔다. 어머니가 자주 다니시던 동해사가 아니라 남장사로 출가한 것은 그 도량에 대한 첫인상이 깊었기 때문이다.
대원 스님이 학교에 다닐 때 남장사로 처음 소풍 갔던 날이었다. 그날 남장사가 동해사에 비해 도량이 넓고 수행하는 스님들도 많은 것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한편으로는 그런 큰절에 사는 스님들이라면 만화책에서 보았던 것처럼 무슨 도술 같은 걸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도 남장사로 출가하여 그런 도술을 부리며 건강하게 자유자재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출가한 뒤로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은 도술을 부리는 사람들도 아니고, 만약 그런 걸 추구한다면 부처님 정법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남장사 일주문
· 집필자 : 이정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