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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실천을 떠나면 불교가 아니다

연기법(緣起法)은 만유(萬有)의 존재 원리이자 존재 방식이다. 뉴턴(Newton)은 눈앞에서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랬다 해서 우리는 그것을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법칙’이라 하지 않고 만유인력의 법칙이라 부른다. 사과는 뉴턴의 눈앞에서 한 알 떨어지기 전에도 무수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유인력은 보편적 자연의 법칙이고 진리다. 만약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통찰한 다음 혼자서 깨달음에 안주했다면, 연기의 법칙은 철학의 형태로 발전했을 것이다. 연기의 법칙은 ‘가르침[宗敎]’으로 설해졌고, 그것을 이어받은 불제자들이 널리 세상에 펼쳐 마침내 화엄세계를 이루었다. 화엄의 세계관으로 이 세상을 보면, 생멸하는 모습 그대로 깨달음의 세계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커다란 의문이 생긴다. 무르게 봐도 현실의 모습 절반은 그대로 지옥이므로. 하지만 우리가 잊어선 안 될 게 있다. 화엄세계는 ‘보살행’이 전제된 세계이고, 보살행으로 이루어가는 세계라는 점이다. 우리가 화엄교학을 세운 고승 대덕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찬탄은 마땅히 보살도를 정립한 점에 모아져야 한다. 연기법의 위대성을 현대 물리학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불법의 우수성을 설득하는 효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만큼의 부작용이 따른다. 바로 연기법을 자연법칙과 같은 것으로 혼동하게 한다는 부작용이다. 앞에서 본 만유인력의 법칙도 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연기법과는 진릿값의 차원이 다르다. 과학적 진리는 그 진리성을, 떨어진 사과를 모든 인류가 골고루 나누어 먹게 하는 데 발휘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몇몇이 독점하여 마침내 사과밭을 몽땅 차지하는 기술로 빛을 발했다. 인류 문명은 그렇게 진보해 왔다. 그러나 연기법은 이와 같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연법칙에 역행한다. 중생의 살림살이 곳곳을 살펴, 빈 곳은 채워주고 낮은 곳은 북돋아 준다. 그것이 ‘무연대자(無緣大慈)’다. 인연 없는 중생이라 하여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연기법의 진리는 과학으로부터 인정받거나 증명되어야 할 만큼 허약하지 않을뿐더러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진리이다. 연기법이 자연법칙과 같은 차원의 진리라면 ‘무연대자’는 행해질 수 없다. 연기법이 불교 교학의 원천이라면 그것을 널리 퍼트려 종교로 세운 실천 원리는 ‘보살도’다. 보살은 모든 중생의 아픔에 응하므로 그 작용의 묘리를 한 마디로 일컬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꼭 한 마디로 줄이자면 ‘자비(慈悲)’일 것이다. 자비하면 딱히 불자가 아니어도 가장 먼저 ‘관세음보살’을 떠올린다. 관세음보살은 어떤 보살일까?
어루만져야 할 중생이 얼마나 많았으면 관세음보살의 손이 천 개나 되었을까? 지켜봐야 할 중생이 얼마나 많았으면 관세음보살님의 눈이 천 개나 되었을까? -자광 스님의 ‘관음기도 회향 발원문’ 시작 부분.
관세음보살의 비원(悲願)을 위 인용문처럼 따뜻하게, 단정하게, 섬세하게 표현한 문장은 쉽게 만나기 어렵다. 슬프게 아름다운 문장이다. 그렇다. 관세음보살은 자(慈)보다는 ‘비(悲)’에 더 어울리는 보살이다. 자광 스님은 전문적으로 글을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님의 글은 문필가가 쓴 빼어난 문장보다 읽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스님은 세 권의 책(『멍텅구리 부처님』, 『깨침의 소리』, 『손으로 쓰고 마음으로 그리는 관음기도』)을 썼는데, 대부분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다. 독자에게 전해지는 감동과 설득력은 거기서 나올 것이다. 자광 스님의 사상적 면모를 살피면서 대담 외에는 상당 부분 스님의 책에 의존했다. 만약 그 책이 학술서였다면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학술적인 내용이었다면 제기한 이론이나 주장의 정합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두거나, 아니면 그것을 요약 정리하여 전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 할지라도 개인의 사상은 또 다른 문제다. 그것으로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연구나 이론을 제기하게 된 배경, 이를테면 살아왔던 시대의 지배적 사상이나 분위기, 성장 과정, 교우 관계, 영향을 받은 인물 등을 살피는 일이 더 필요하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는 자신의 속내를 진솔하게 드러낸 편지글 한 통에서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 위에서 본 발원문의 문장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한 권의 책보다도 더 절절하게 관세음보살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존재인지를 그려낸다. 그 절절함은 언어의 조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광 스님이 살아낸 삶의 절절함에서 나왔다고 판단하는 것이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이미 밝혔듯이 자광 스님이 군승으로 월남전에 참전한 때는 30대 초반이었다. 정신적 화상을 입었다 해도 모자랄 표현일 정도로 참혹한 상황을 목도했을 것이다. 전장에서의 삶은 죽음을 전제한 삶이다. 죽음이 규정하는 삶은, 이미 죽음에 속한 것이다. 삶이 아니라 단지 죽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이런 삶과 죽음의 실상을 보면서 자광 스님은 무상과 무아를 몸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간절히 기도하며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구했을 것이다. 스님은 이 세상의 온갖 다툼과 장애를 극복하며 사는 길은 ‘자비’의 실천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자비로운 삶이야말로 진정 법계연기의 사사무애(事事無碍)가 아닌가.
화엄경 변상도
자광 스님의 사상적 면모를 ‘지계 사상’, ‘연기 사상’, ‘전법 사상’, ‘경전관’, ‘생활불교관’의 측면에서 살펴봤다. 그 내용을 다시 간추려 정리해 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첫째, 일상이 계행인 불방일(不放逸)의 삶이 지계 정신의 핵심이다. 〈초발심자경문〉을 신독(身讀)하고, 은사이신 청정 율사 경산 대종사 문하에서 계행을 닦았던 영향일 것이다. 둘째, 자광 스님은 일찍이 연기 사상을 불법 실천의 사상적 기둥으로 정립했다. 동국대학교 학부 전공이 ‘인도철학’이었던 것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 전법 사상의 핵심은 연기법을 중심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함으로써 불자들의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고 그 과정을 자기 수행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넷째, 자광 스님의 경전관은 경전의 요의를 실천 즉 보살행의 원리로 삼는 것이다. 다섯째, 자광 스님의 생활불교관은 기도를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으로 보고 일상이 연기적 삶의 실천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삼아서 자광 스님의 사상적 행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자광 스님은 연기의 샘에서 화엄의 바다로 나아가는 일생을 살았다.
동국대 이사장 시절 자광 스님이 연기적 삶의 실천을 설하고 있다.
· 집필자 : 윤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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