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길을 두고 왜 그렇게 어려운 길을 가?’ 일상에서 우리가 자주 듣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생기는 첫 번째 의문. ‘쉽고 어렵고’의 기준은? 없다. 쉬움과 어려움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애당초 절대 기준 같은 것이 붙어 설 자리가 없다. 말하고 듣는 사람의 생각과 판단이 기준이다. 문제는, 저마다 자신의 주관을 절대 기준인 양 착각하는 데 있다. 이런 착각 때문에 왕왕 멱살잡이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심각한 사태로 발전하는 일은 드물다. 화자와 청자의 입장이 뒤바뀐 경험을 해 봐서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이를 갈며 ‘바보 같은 놈’, ‘어디 한번 두고 봐’ 하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것으로 충돌은 미봉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주관이 가치판단으로 비약하면, 대책이 없다.
불교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을 어려운 길과 쉬운 길, 이렇게 두 갈래로 설정하여 앞엣것은 ‘자력문(自力門)’ 뒤엣것은 ‘타력문(他力門)’이라 이름한다. 다른 말로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라 일컫는다. 자력문 즉 난행도의 대표적 수행법으로는 ‘참선(參禪)’을 든다. 염불·주력·독경·간경·사경 등을 타력문 즉 이행도라 하고 그 모든 방편을 뭉뚱그려 ‘기도’라 칭하기도 한다. 여기서도 문제는, 난행도와 이행도를 다름이나 차이로 보지 않고 우열(愚劣)이라는 가치 개념으로 바라보는 데 있다.
2017 나란다축제, 자광 스님은 이행도의 편에서 쉬운 불교를 강조한다.
현재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에서는 참선만이 수승한 수행법이고 기도는 하열한 근기의 소유자들이나 하는 ‘기복’ 쯤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팽배를 넘어 거의 고착화되었다. 그 이유까지 생각해 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현상 이해를 위한 언급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과연 ‘기도’가 그러한지에 대해 자광 스님의 ‘기도 수행관’을 통해 성찰해 보기로 하자.
자광 스님은 현재 한국불교의 일반적 수행관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기도는 당연히 수행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아예 용어조차도 ‘기도 수행’이라고 명토 박는다.
불교의 기도는 깨달음의 수행법으로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친숙한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특히 초심자들이나 수행의 입문 단계에서 기도를 하면 수행의 기틀이 잡힙니다…(중략)…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비운 다음에 기도해야 합니다. 물이 가득 차 있는 찻잔에 또 다른 물을 넣으면 흘러넘치는 것처럼 욕심이 가득한 마음에는 불보살의 위신력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중략)…기도를 하면 스스로 알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수많은 사람들의 고맙고도 은혜로운 인연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연법을 알게 되면 곧 감사한 마음이 되고, 주위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연 만물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남을 위한 기도, 세상을 위한 기도가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궁극의 경지를 깨닫게 되고, 우리 모두가 불국토를 건설하는 보살행자임을 알게 됩니다.
-자광 스님, 『손으로 쓰고 마음으로 그리는 관음기도』, 25~27쪽.
자광 스님은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의 가피를 당당하게 요구하라.”고 말한다.(위의 책, 6쪽)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위 인용문으로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행도는 과연 쉬운 길인가, 그리고 그것이 하근기의 사람들이나 하는 수행일까. 자광 스님의 말처럼, 기도는 ‘초심자들이나 수행의 입문 단계의 사람들이 수행의 기틀을 잡게 한다.’는 의미에서 쉬운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하열한 사람들의 수행이라고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난행도와 이행도라는 두 갈래는 불교 최고의 논사로 대승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며 보살로까지 추앙받는 용수(龍樹, Nāgārjuna) 스님이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이행품」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견해에서 시작됐다. “불법에는 무량한 문이 있다. 세간의 도에 난(難)과 이(易)가 있으니, 육로로 걸어가는 것은 고행이고 수로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쉬운 길이다. 이와 같이 보살의 도에도 난행 정진하는 사람이 있고, 믿음이라는 방편으로 쉽고 빠르게 아유월치(阿惟越致, avinivartanīya, 不退轉)하는 사람도 있다.” 이 문맥 어디에서도 난행도와 이행도를 우열(優劣)로 바라보는 가치판단의 어조를 읽을 수 없다. 둘 다 ‘보살의 도’라 했고, 이행도 역시 ‘아유월치’, 즉 보살에서 범부로 떨어지는 일이 없는 불퇴전의 경지임을 분명히 했다. 이행도 역시 해탈의 길이라는 것이다.
쉬운 것이 마냥 쉽기만 할까. 쉽다고 해서 하찮은 것일까. 적절한 예일지는 모르겠지만, 축구 선수 메시를 보자. 메시는 정말 쉽게 차고 쉽게 골을 넣는다. 최고의 경지는 이렇게 쉬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모든 걸 쉽게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에서든 쉬움과 어려움을 가치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아직 구구단을 몰라서 손가락셈을 하는 아이를 보고 열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아이에게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셈법이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우리는 미개(未開)한 상태이지 열등한 상태가 아니다.
신라의 원효(617-686) 스님은 계를 범한 후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다. 이후 ‘무애의 노래(無碍歌)’를 부르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누볐다. 당대의 평범하고 미천한 대중 속으로 스며들어간 것이다. 그리하여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삼국유사』, 「의해편」 〈원효불기(元曉不羈)〉)
고려시대의 균여(923-973) 스님은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바탕으로 보현보살의 행화(行化)를 「보현행원품」이라는 향가로 노래했다. 원효 스님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자광 스님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일생을 포교에 헌신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을 친근하게 여김으로써 불법의 궁극에 도달할 수 있도록 ‘수행으로서의 기도’를 권하는 것이다. 스님은 불교가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고, 우리가 하루하루 행하는 말과 행동이 우리의 삶을 만든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기도·발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설한다. 이러한 스님의 마음은 원효 스님이나 균여 스님의 마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광 스님은 염불하고, 사경하고, 독경하는 ‘기도’가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의 길이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일상과 기도를 일체화할 때 깨달음은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핵심은 앎과 행함의 일체화다. 불법을 일상으로 당겨와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내 삶의 방법을 불법에 맞추어 향상하는, 그래서 자유로워지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자광 스님이 말하는 기도 수행의 궁극이다.
자광 스님은 불교 대중화를 위해 일생을 포교에 헌신했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