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보살의 존재 이유이자 존재 방식이다. 불교 수행자라면 모름지기 위로는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의 실천자여야 한다. 위로 구해야 할 지혜는 ‘자리(自利)’, 아래로 행해야 할 중생 구제는 ‘이타(利他)’와 맞닿는다. 그런데 ‘위·아래(上下)’를 위계나 경중, 순서로 오해하면 글자에 걸려 대승(大乘)이라는 보살도의 수레를 전복시키는 꼴이 된다.
자리이타는 동시적 상즉상입(相卽相入),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로 발현된다. 자리와 이타 또한 연기(緣起)의 관계인 것이다. 보살행으로서 자리와 이타는 불이(不二)의 관계지만 현실에서 겉보기로는 어느 한쪽에 방점이 찍힌 듯 비치기도 한다. 자광 스님의 경우는 ‘이타’에 방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하화중생을 위해 상구보리하는 삶이었다. 자광 스님은 오로지 연기법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구체적 모습이 전법(傳法), 즉 포교였다.
종비생 1기 스님들과 함께
자광 스님은 은사 스님의 무릎 아래서 그리고 해인강원과 동국대학교에서 불법의 대의를 익혔다. 그런 다음 곧 군승으로 전법 현장에 뛰어들었다. 군인이어도 본질적으로는 스님이지만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살생을 계율의 으뜸으로 삼는 자비의 종교에서 어찌 고민이 없을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은사이신 경산 대종사는 청정 율사였다. 은사 스님은 군 포교 현장으로 나가는 자광 스님에게, 포교를 위해 떠나는 푸르나(Pūrna)와 그를 보내는 부처님의 대화를 들려주며 당신의 심정을 가탁했다. 자광 스님은 그때 은사 스님의 육성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푸르나여, 그곳 사람들은 성질이 사납고 거칠다고 들었다. 만일 사람들이 그대를 대중의 면전에서 비난하고 비방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는가?”
“부처님, 그때는 그들이 지팡이나 돌멩이, 혹은 손질, 발길질로 저를 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중략)…
“그러면 칼로 그대를 죽일 때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때는 이렇게 생각하겠습니다. 불자들 가운데는 인생의 온갖 고뇌가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칼이나 독물로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 했던 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번거로움을 덜어 준 것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잡아함경』
종교의 요체는 실천이다. 어떤 종교든 그 가르침이 실천되지 않으면 생명을 잃는다. 특히 불교는 연기법이라는 특유의 교리 때문에 이론 중심으로 논구가 치우칠 경우 철학으로 기울어질 위험성이 다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전법이었다. 이른바 초전법륜. 녹야원으로 가서 예전에 고행림(苦行林)에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비구를 만나 중도를 설했다. 이것이 불교의 시작이다.
자광 스님은 군승으로 임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0대 초반에 월남전에 참전했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비무장으로, 생사의 경계 위에 선 것이다. 죽고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비와 평화를 역설(力說)해야 하는 역설(逆說)의 현장. 사바의 실상과 마주한 것이다. 자광 스님이 월남전에서 한 일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주검’을 맞이하는 일이었다. 시신을 싣고 온 헬기가 법당 뒤에 착륙하면, 군복을 벗고 가사 장삼을 수한 다음 시신을 안치하고 염불을 했다. 그런 다음 부대원들과 함께 시신을 염했다. 이런 일이 무수히 반복됐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보낼 수는 없다. 이미 간 사람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망자를 ‘보내 드린다’고 한다. 죽은 자를 보내는 일은 결국 산 자의 ‘살아가는 일’이다. 망자의 왕생극락을 빈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정토로 만들겠다는 희구이기도 하다. 입적한 스님들의 다비식 절차를 보면 ‘생로병사’의 과정을 재현한다. 잘 사는 일이 잘 죽는 일임을 시현하는 것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말을 하지만,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다. 자광 스님은 전몰장병의 왕생을 비는 것만큼이나 절박하게, 살아 있는 장병들을 위무해야 했다. 네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할 사람이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어야만 했다. 전장에서 생명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만큼의 비극은 없다. 그래서 스님은 전투를 앞둔 장병들에게 ‘사람을 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말해야만 했다. 이보다 더 절실한 군승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자광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생사가 걸린 위급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스님이 복무하던 부대에 ‘삼청교육대’가 설치되어 운영 중인 때였다. 스님은 삼청교육대 입소생들과도 자주 만나 그들의 얘기를 들어 주고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단 법당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한밤중에 사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삼청교육대 막사에서 기간병과 교육생이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 중이니 빨리 사태를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사단장은 급박한 상황에서 왜 군승을 불렀을까. 사단장은 자광 스님이 삼청교육대 입소생들과도 평소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했다. 도로 작업에 동원되어 외부로 나갔던 삼청교육대 입소생이 지나가던 버스 승객으로부터 담배를 얻어 핀 것이 발단이었다. 기간병은 강압적으로 제지했고 이에 격분한 교육생이 기간병의 총을 빼앗아 막사로 들어가 부대원과 대치하며 서로 총격을 가하는 사태로 악화된 것이었다. 이미 ‘피아’로 갈라진 상황에서 별을 단 장군의 명령이라 한들 통할 리가 없었다.
스님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님으로서 할 일을 해야 했다. 무고한 죽음을 막는 것. 스님은 메가폰을 잡고 “나는 너희 스님이다.” 하고 외친 다음, 비무장임을 확인시키기 위해 상의를 벗고 ‘러닝 바람’으로 막사로 향했다. 이때 스님은 온전히 ‘너희’ 스님이었다. 걸으면서 스님은 ‘부모님 은혜’를 소리 높여 불렀다. 생명의 감각을 깨운 것이다. 그들도 하나둘씩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 순간 이미 무장은 해제됐다. 막사 안은 유혈이 낭자했다. 부상자를 내보내며 총을 내려놓게 했다. 엄청난 비극으로 번질 수도 있었던 일을 비구의 ‘본분사(本分事)’로 해결했던 것이다.
자광 스님은 생사의 문제가 달린 절박한 곳에서, 인간의 밑바닥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갈등의 현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화두 타파라는 것이 어디 선방에서만의 일일까. 기도 가피라는 것이 어디 ‘갓바위 부처님’ 앞에서만 가능할 일일까.
만 중생을 사랑하기는 쉽다. 인류를 사랑하기는 더 쉽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떨고 있는 구체적 한 인간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자광 스님에게 전법은 비구의 본분사이자 보살도의 실천이었다. 특히 군승의 길은 세간 한가운데서 출세간의 삶을 사는 일이었다.
호국영령 천도대법회에서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