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다방편, 다경전의 종교다. 팔만사천 법문 혹은 팔만사천 교문이라 일컬어지는 방대한 교설이 펼쳐져 있다. 대승불교라 해도 소의(所依)하는 경전에 따라 종파가 다양하다. 현재 이루어지는 수행 방편도 기도, 독경, 간경, 염불, 주력, 참선 등으로 여러 길이 있다. 신도의 입장 특히 초심자의 경우는 갈 길이 막막하기 십상이다. 이 책 저 책, 이 방편 저 방편을 찾다가 나름의 안목이 열렸다 싶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 보니 코끼리 다리를 잡고 코끼리라고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팔만사천 법문이라 불리는 부처님의 장광설, 그 연원은 어디일까. 가장 쉬운 답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일 것이다. 그 낱낱의 번뇌에 응하여 이른바 대기설법(對機說法)이 나왔다. 쉽고, 감동적이기까지 한 대답이지만 일정 부분 자기 합리화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교사를 보면 수많은 분열이 있었다. 율장에 대한 해석과 사상적 견해 차이에 따른 분열(근본분열)로 부파불교 시대가 도래했다. 교의 해석을 둘러싼 부파 간의 논쟁에는 다양한 쟁점이 있었지만 핵심은 연기법, 더 줄여 말하면 ‘무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부파불교의 아비달마는 교의를 정교화했지만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분석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되면서 삶과 멀어졌다. 반야경이 나오면서 ‘무아’는 ‘공(空)’으로 내포를 더했고, 용수(龍樹, Nāgārjuna) 보살은 『중론』으로 공사상을 ‘공(空)-가(假)-중(中)’으로 체계화했다. 마침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대승사상이 무르익었고, 『화엄경』과 같은 경전이 집성되었다. 그래서 용수 보살을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하고, 『화엄경』을 대승경전의 왕이라 하는 것이다.
불교는 사상과 실천 양면 모두 다층적이다. 주요 교리 사이에 무아와 윤회의 문제 같은 모순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총화가 불교다. 세상에 이런 고등종교는 없다. 시대가 흐르고 전승 지역을 달리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현실의 문제와 길항한 결과일 것이다. 현대 한국불교만 봐도 인도, 중국, 일본, 티벳 불교 사상까지 들어와 있다.
연기법을 설하는 자광 큰스님
좀 장황한 전제를 앞세웠는데, 자광 스님의 법문 곳곳에 심지어는 일상을 반듯하게 하라는 평범한 내용의 설법조차 연기법의 도리로 귀결시키는 까닭을 해명하기 위해서이다. 짐작컨대 스님은 불교가 어떤 방향으로 가든, 불자 개개인의 신앙이 어떤 쪽으로 흐르든, ‘연기법’이라는 중심을 잃지 않는다면 정법에서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지닌 듯하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침반을 쥐어 주는 심정으로 연기의 도리를 전했을 것이다.
此有故彼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此起故彼起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此滅故彼滅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잡아함경』
연기법을 정식화한 문장이다. 흔히 연기의 기본 공식이라고 일컫는다. 쉽다. 어려운 단어 하나 없다. 일상적 언어 소통만 가능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해라는 것이 바닷물 한 방울의 짠 맛을 본 다음 바다를 다 알았다 하는 것처럼 허황된 이해일 가능성이 높다. 연기법이 4성제, 8정도, 6바라밀, 12연기, 나아가 『화엄경』의 10바라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설사 그것까지는 이해된다 할지라도 연기법의 본질이 세계와 사물의 본질, 즉 존재의 실체 없음. 무아의 도리임을 체득하게 하는 일은 어렵다. 오죽했으면 부처님도 깨달음을 성취한 후 설법을 망설였을까. 물론 ‘범천권청’ 설화는 석가모니 부처님 사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사가 필요했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연기법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자광 스님은, 우스갯말로 ‘초코파이 불교’라고 불리는 군 포교 현장에서도 연기법의 도리를 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려운 책도 백 번 읽으면 통한다 했듯이, 훈습의 효과를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자광 스님은 군 포교 현장에서도 늘 연기의 도리를 강조한다.
자광 스님은 연기법을 실천의 문제로 인식하고, 보살행을 하다 보면 자연히 연기의 도리를 체득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자광 스님은 12연기의 열두 고리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창조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환멸연기(還滅緣起)’를 ‘창조적인 삶’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환멸연기란 12연기의 역관(逆觀)으로 역연기(逆緣起)라고도 하는데, 무명을 없애 행을 멸하는 식으로 적멸에 이르는 길을 일컫는다. 쉽게 말하자면 12연기의 고리를 끊는 것이 환멸연기다.
12연기란, 무명(無明, 근본적인 어리석음)-행(行, 잠재적인 무의식력)-식(識, 마음의 단초)-명색(明色, 이름과 물질)-육입(六入, 여섯 가지 감각기관)-촉(觸, 느낌)-수(受, 감수 작용)-애(愛,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취(取, 집착)-유(有, 존재)-생(生, 태어남)-노사(老死, 늙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이 12연기이다. ‘무명’에서 ‘노사’에 이르고, 다시 반복하는 것이 윤회다. 삶의 고통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이러한 12연기의 과정을 순관(順觀)이라 하는데 유전연기(流轉緣起)라고도 한다. 이 유전연기에 대응하여 고통의 고리를 끊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 환멸연기다.
자광 스님은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열반에 이르는 수행의 길이라고 설한다. “영원불멸하는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의 세계로 가는 수행의 첫걸음인 것입니다.”(자광 스님, 『깨침의 소리』, 23쪽. 이하 인용된 자광 스님의 말씀은 『깨침의 소리』가 출처임.) 자광 스님의 이 말씀은 ‘무아’를 자각하라는 것이다. 무아의 근거가 ‘연기된 존재로서의 나’라는 사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 현실적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강화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다. 당연히 집착이 따르고 고통의 질곡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고통에서의 해방을 위해,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무아’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자광 스님은 끝없이 연기법의 체득을 강조한다. “우리 불교에서는 창조의 근본을 협력과 의존관계로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연기법을 8만4천 대장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진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자광 스님은 무아와 연기법을 ‘욕심 버리기’를 통해 실감하라고 설한다. 욕심 버리기란 보살행에 다름 아니다. 그래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자광 스님은 ‘환멸연기’의 도리를 ‘자유로운 삶의 길’이라 했다. 그것이 ‘창조적인 삶’이라고 우리를 설득한다.
‘욕심버리기’를 통해 무아를 실감해야 한다는 자광 스님의 두루마기.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