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緣起)는 불교의 근본 교의다. 소승·대승, 선·교, 초기불교(관점에 따라서 원시불교, 근본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밀교 가릴 것 없이 ‘연기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연기법에서 벗어나면 불교가 아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불교는 ‘연기라는 샘에서 발원하여 화엄의 바다’를 이룬 종교다. 연기법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교를 알 수 없다.
자광 스님의 사상적 기둥은 연기법이다. 사실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하나 마나 한 말이나 다름없다. 세상 어떤 스님도 연기법의 기반 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한 까닭은, 스님이 대중법문이나 글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할 때 유난히 연기법을 강조해서가 아니다. 스님은 지계의 중요성을 설할 때도, 경전의 가르침을 전할 때도, 선정의 의미를 일깨울 때도 연기법으로 귀결시키기 때문이다. 스님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스님이 펴낸 책이나 더러 기록으로 남아 있는 대중법문을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 면면은 스님의 글과 법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8. 동대부고 석가모니불 점안식에서 연기법을 설하는 자광 큰스님
성급한 면이 있지만, 연기법과 관련한 자광 스님의 사상적 면모에 대한 결론을 당겨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다른 이유는 없고, 논의를 이어갈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이렇다.
자광 스님은 연기법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받아들였다. 자광 스님에게 연기법은 ‘보살행’이다. 자광 스님에게 연기법은 ‘자비’다. 자광 스님은 재가 불자들에게 연기법에 대해 설할 때, 이론적 설명보다는 실천의 과제로 직입한다. 다음은 ‘중도로 가라’는 글의 첫 부분이다.
‘중도(中道)’란 가운데 길이 아니라 가장 크고 바른 길을 말한다. 사람들이 받는 고통의 원인은 삼독 즉 ‘탐·진·치’다. 그러니 탐하지도 말고, 속지도 말아야 한다. 중도를 바로 알기 위해서 팔정도를 실천하여 삼독심을 제거하자.
-자광 스님, 『멍텅구리 부처님』, 121쪽.
중도의 정곡을 찌른 견해다. 세간에서 부처님의 중도를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계량적 중간 혹은 기계적 중립, 심지어는 제3의 길로 이해하기도 한다. 오해다. 자광 스님은 ‘중도란 가운데 길이 아니라 가장 크고 바른 길이며’, ‘중도를 바로 알기 위하여 팔정도를 실천하자’고 했다. 과감한 주장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부처님 말씀을 들어 보자.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욕망에 따라 쾌락에 탐닉하는 것으로, 열악하고 야비하고 범부가 행하는 것이고, 천하고 이익이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피로하게 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괴롭고 천하며 이익 됨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이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적정(寂靜)·증지(證智)·정각(正覺)·열반(涅槃)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여래가 원만히 깨달았고,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적정·증지·정각·열반으로 이끄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팔정도를 말하는 것이니,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원만히 깨달았고 열반에 도움이 되는 중도이다.
-『전법륜경(轉法輪經)』
위에서 보았듯이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중도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양극단을 벗어났다는 의미의 중도로, 그 내용은 ‘팔정도’다. 실천 행위로서의 중도가 팔정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중도와 연기법은 어떻게 대응할까.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며 알아차리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단순한 사유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망을 좋아하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을 탐닉하고 있다. 욕망을 좋아하고 욕망에 빠지고 욕망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지, 즉 ‘이것에게 조건 짓는 성질인 연기(緣起)’를 본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범천 권청(梵天勸請)’ 설화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연기를 보는 자는 곧 나(붓다)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본다.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위에서 본 것처럼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연기법이다. 따라서 중도가 곧 연기법이고, 연기법의 실천이 팔정도인 것이다. 자광 스님의 ‘팔정도의 실천을 통한 중도 바로 알기’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 가운데 하나인 사성제(고-집-멸-도)의 환멸연기(멸-도)에 해당한다. 이처럼 자광 스님의 법문은 연기법에 대한 확고한 경전 근거와 교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이를 전달하는 방식은 실천 위주다.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교리에 대한 현학적 설명이나 훈고적 해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천론으로 직입한다. 억측일지 모르겠지만, 오랜 군승 생활의 영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광 스님은 불교를 믿고 불법의 진리를 배우는 이유를 자비의 실천에서 찾는다. 인연의 법칙 속에서 사는 우리가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하면 자비로운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마음을 닦아 육신을 조복 받는 수행이 깊어지면 자비심과 하나가 되어서 가는 곳마다 자비로 가득 차고, 손길마다 자비가 넘쳐나고,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가득해진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자광 스님에게 연기법은 자비다. 연기법에 투철하면 자비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스님의 일관된 견해다.
- 글 속의 경전 인용문은 마성 스님의 『초기불교사상』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동국대학교 이사장 시절, 미화근로자에게 직원증을 수여하며 격려하고 있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