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 스님은 천생 스님이다. 상당히 주관적인 표현이지만, 스님의 출가 사연과 은사이신 경산 대종사와의 인연을 톺아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자광 스님은 발심 출가자다. 그렇다 해서 생사 해탈 같은 거창한 목표나 절체절명의 고뇌가 마음을 일으킨 것까지는 아니었다. 한 스님과의 우연한 만남이 계기가 되었지만 그것이 운명적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발심 출가인 것만큼은 분명하다.(이에 대해서는 ‘생애’ 편에 소상히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발심의 동기가 아니라 발심 이후의 행보이다.
자광 스님으로 하여금 출가를 결심하게 한 스님을 만난 곳은 전주였다. 그리고 그 스님은 출가 사찰로 ‘화엄사’를 권했다. 그런데 전주 가까이에는 ‘금산사’라는 대찰이 있다. 어차피 전국 어느 사찰이든 아무런 연고가 없었으니 가까운 곳을 찾는 것이 상식적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교통이 요즘 같지 않아서 구례에서부터 걸어야 하는데도 굳이 화엄사를 찾았다. 출가의 마음을 일으킨 최초의 절이었으니까, 그곳으로 간 것이다. 자광 스님은 화엄사에서 6개월 남짓 행자 생활을 했다. 말이 그럴듯해서 행자지 머슴살이가 따로 없었다. 채공에 부목 노릇까지, 하루해가 짧았다. 첫새벽에 일어나 개울의 얼음장을 깨 세수를 하고 법당으로 들어가면 바닥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발심수행장」을 몸으로 읽어낸 것이다.
화엄사 각황전(1976)
「발심수행장」은 초심학인들의 필독서인 『초발심자경문』의 한 부분인데 원효 스님이 지은 글이다. 아마도 “절하는 무릎 얼어붙더라도 불 그리는 마음 없어야 하고[拜膝如氷, 無戀火心.], 주린 창자 끊어질 듯하여도 먹을 것 구할 생각 없어야 할지니라[餓腸如切, 無求食念.]”는 구절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을 것이다.
자광 스님은 「발심수행장」이라는 글의 제목도 들어보지 못했을 때, 그 글의 내용을 체화했다. 스님의 수행자로서 본분사에 대한 인식과 행위는 생득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행자 시절이 6개월 쯤 지났을 때, 당시 화엄사 주지였던 최진여 스님이 자광 스님을 불렀다. 총무원 교무부장인 경산 스님으로부터 시봉을 할 행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즉, 가서 은사 스님으로 모시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의향을 물었다. 질문의 형식을 취했으나 사실상 명에 가까웠고, 자광 스님의 대답 또한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한 마디였다. 자광 스님과 은사 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자광 스님은 천생 스님이다’는 말을 불가의 언어 용법으로 바꾸어 보면, ‘자광 스님은 수행자의 근기(根機)를 타고났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말과도 통한다. 우연히 만난 스님이 가리킨 화엄사를 향해 곧장 나아갔고, 『초발심자경문』을 구경조차 하기 전에 ‘절하는 무릎 얼어붙더라도 불 그리는 마음 없어야 한다’는 수행자의 본분을 몸과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마침내 평생 삶의 등불이 될 은사 스님과의 인연을 맺은 것이다.
인연수순(因緣隨順). 순순히 인연에 따른다는 것이다. 말로는 쉬울 것 같은데 정말 어렵다. ‘자아’가 강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먼저 ‘나’를 내려놓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비유컨대 물처럼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벼랑을 만나면 폭포로 흘러야 하고 어느 때는 땅 속으로 스몄다가 하늘로 샘솟는다. 호수를 이루기도 하지만 작은 웅덩이에서 염천으로 오르기도 한다. 물조차도 현실 속에서는 생로병사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물며 사람의 삶에 있어서랴. 인연수순.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남의 선행을 기쁘게 따르는 ‘수희(隨喜)’를 공덕의 바다로 여기는 것이다.
계를 받는다는 것은 한 인간이 불자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서원이다. 무거운 약속이다. 그래서 수계의식은 규모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장엄하다.
수계의 본질적 의미는 ‘계체(戒體)’를 형성하는 데 있다. 계체란, 계의 본체로 ‘방비지악(防非止惡)의 힘’을 말한다. 선가(禪家)의 어법을 빌리자면, ‘생각 이전의 생각’, ‘계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혹자는 신비적이고 허황된 언술이라고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개의할 바 아니다. 설사 계를 받은 사람이 계를 깨뜨린다 할지라도, 그럴 때마다 ‘께름칙함’이라는 자기 검열의 죽비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계체는 그렇게 작동한다. 인연수순. 계체와 조응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2018 논산육군훈련소 호국연무사 수계법회
인연수순하는 자광 스님의 행보는 은사 스님과의 만남 이후에도 계속된다. 지면이 넉넉하지 않으므로 그 과정을 큰 걸음으로 따라가 보자.
자광 스님은 사미계를 받은 후 은사 스님의 명에 따라 2학년으로 중단한 고등학교 학업을 마저 마친다. 이후 조계사에서 한국 어린이 포교의 선구자인 운문 스님(1928-2018)을 도와 어린이 법회와 청소년 법회를 함께 했다.(이때 훗날 군 포교의 맹아가 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곧 해인강원으로 떠났다. 수행자로 살아가려면 먼저 불법의 대의를 익혀야 하는 불가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해인강원은 6년제였는데 2년만 마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제1기 종비생(宗費生)으로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은사 스님으로부터 뜻밖의 명을 받는다. 한 번 더 군대에 가라는 것이었다. 은사 스님께서 애써 이룬 군승(軍僧) 제도의 안착을 위해 당신의 상좌를 방편으로 쓴 것이었다. 이번에는 군승 장교였다. 중위로 임관하여 대령으로 예편할 때까지 25년 동안 군승으로서 수행을 이어갔다.
잠시 쉬어 가자. 자광 스님은 삶의 이정이 확연히 바뀌는 중대한 결정 앞에서도 무조건 은사 스님의 명에 따랐다. 물론 어느 정도의 번민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는 한 마디였다. 마치 할 수 있는 대답이 그것뿐인 양.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아름다운 풍광이다. 어쩌면 자광 스님은 은사 스님이 종단 총무원장 재임시 정초한 ‘교육(도제 양성)·포교·역경’이라는 조계종단의 3대 지표가 여법하게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한 ‘임상 수행’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도구적 대상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 자광 스님은 경산 대종사의 낙처(落處)였다.
인연수순. 계체가 바로 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정녕 계의 열고 닫음에 자유로우려면 지계에 철저해야 한다.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