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 스님은 단순하다. 스님의 회고담을 듣고 읽다 보면 그러한 면모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데, 다음 일화는 압권이다. 동국대학 재학 시절 학인 스님들의 기숙사인 ‘백상원’에서 라면을 먹을 때 수프를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벌인 논란을 떠올리며 쓴 글에서 자광 스님은,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부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먹지 않는 것이다.” 하고 술회한다.(자광 스님, 『멍텅구리 부처님』 202쪽.)
얼마나 단순한가. 아이 같은 천진한 믿음으로나 다가갈 수 있을 단순함이다. 지계의 중요성에 대한 어떤 치밀한 논증도 이런 태도 앞에서는 머쓱해질 수밖에 없다. 세간에서 행해지는 기예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함은 궁극의 기교’(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하지 않는가.
위 인용문으로만 본다면 계율에 대한 자광 스님의 입장은 요지부동의 근본주의자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계에 융통성을 발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님은 ‘계·정·혜’로 체계화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비행’으로 귀결시키는 실천가였다. 자비를 모든 행위의 준거로 삼았다는 얘기이다.
2017. 백상원을 방문한 자광 스님
계는 크게 지지계(止持戒)와 작지계(作持戒)로 나뉜다. 글자 뜻 그대로 ‘~을 하지 말라’는 것이 지지계이고, ‘~을 하라’는 것이 작지계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는 작지와 지지가 부딪치는 일이 왕왕 벌어진다. 흔히 드는 예로, ‘어떤 여인이 물에 빠졌다. 지나가던 비구는 그 여인을 구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범계를 하지 않으려면 ‘여인의 손’을 잡지 말아야 하고, 자비행을 하려면 손을 잡아야 한다. 이런 난관에 대비해서 일찍이 보조 스님께서 ‘지범개차(止犯開遮)’의 법문을 시설(施設)해 놓았다.
‘지범개차’는 보조 스님이 초심학인을 위해 쓴 「계초심학인문」에 담긴 “오계와 십계 등을 받아 지니고, 지킴과 범함이라는 계의 열고 닫음에 바른 안목으로 대처해야 한다[受五戒十戒等, 善知持犯開遮]”는 문장의 한 부분이다. 후학을 위한 노덕의 자상함이 느껴지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그 뜻하는 바가 현실의 세세한 문제에 적용하기에는 그물코가 자못 성글다. 그러나 이걸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본시 큰 가르침은 봉황을 잡는 그물 같은 것이어서, 참새는 빠져나가는 것이 당연하다. 문제는 ‘지범개차’를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수행자 스스로 자신의 허물에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악용되는 데 있다. 이에 대한 자광 스님의 말을 들어 보자. 지범개차의 기준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뜻이 요긴하다.
지(持)는 자신이 받은 계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지계의 실천이고, 범(犯)은 자신도 모르게 계를 범했을 때 반드시 참회하여 계율을 세우겠다는 서원입니다.
개(開)는 보살행의 방편으로, 가령 한 생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계율을 어기는 과보를 받을지언정 먼저 살려내려는 자비심의 방편이며, 차(遮)는 어떤 방편도 통하지 않을 경우 차라리 닫아 버리라는 뜻입니다.
지눌 스님의 본뜻은 계율을 여닫는 방편에 있어서 걸림 없이 행하라는 것이 아니고, 철저한 계율 실천의 서원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많은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는 계를 파할 수도 있지만, 그 계를 파한 과보까지 짊어지더라도 생명을 살리겠다는 대자비심의 원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광 스님, 『깨침의 소리』 174~175쪽
‘계를 파한 과보까지 짊어지겠다’는 전제하에 ‘대자비심을 실천하겠다는 원력’이 개(開, 방편으로서 계를 여는 것)라는 말씀으로 헤아릴 수 있겠다. 스님의 ‘단순함’은 이런 종류의 단순함이다. 자비행인가, 아닌가. 오로지 이것을 기준으로 ‘지범개차’하라는 것이다.
요즘에는 세간에서도 ‘대승’이라는 말이 일상어로 쓰인다. 특히 정치권에서 남용하는데, 대부분은 오용이다. 대승은 크고 작고, 많고 적고를 따지는 차별지의 세계에서 운위될 말이 아니다. 대승이라는 말이 일상에서 쓰이는 맥락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이익 또는 수적 다수의 이익을 강변한다. 좋게 보아도 공리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보살도를 전제한 자비행이 아니면 대승이 아니다.
세상은 사바 즉 감인세계(堪忍世界)다. 부처님 당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보살행이 어려운 건 당연하다. 그 당연한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비를 행하는 것이 보살의 삶이다. 승속을 막론하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스님은 자신의 인연이 닿는 곳에서 힘자라는 대로 자비를 실천하라고 설한다. 보살행을 좋은 삶의 보편원리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자유로워지려면 계율이 잘 맞는 옷처럼 되게 하라는 것이다. 자광 스님의 계율관은 금계(禁戒) 즉 지지계도 작지계로 행하라는 입장이다.
자광 스님은 단순히 계율을 지키는 것보다 계율의 본뜻을 살펴 올바른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살생계’의 경우 단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뜻에 국한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근거 없이 남을 헐뜯거나 의심하고, 단지 추측에 불과한 몇 마디 말로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도 살생이며, 남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도 살생이라 여겨야 한다고 설한다. 더 나아가서 사물의 본질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 역시 살생이라는 관점에서 사물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쓸모없게 만드는 것 역시 살생’이라는 견해는, 지지계의 작지계화 차원을 넘어 모든 사물에 내재한 본연의 생명력에 귀 기울이라는 가르침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가령 멀쩡한 물건인데 자신에게 쓸모가 없다면, 쓰레기 취급하고 방치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이웃이 쓰게 하라는 말씀이다. 자광 스님에게 계율은 “생명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며, 우주와 하나 된 세계의 공생 원리”이다.(자광 스님, 『깨침의 소리』 162쪽)
자광 스님은 지계바라밀을 ‘당당하고 자유로운 삶의 길’이라고 우리를 일깨운다. 이러한 자광 스님의 가르침은 특히 재가 불자들에게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의 길이 될 것이다. 좋은 인연을 만들고, 방해받을 인연을 떨치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7. 주요기관장 합동워크숍에서
· 집필자 : 윤제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