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 스님을 상징하는 이미지는 단연 법을 전하는 법사, 즉 포교사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스님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계율에 밝고 이를 철저하게 실천하는 율사(律師)다. 조계종의 대표적인 율사였던 은사 경산 스님의 율맥을 이어받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율학을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불교조계종 호계원 초심호계위원을 거쳤으며, 2015년에는 호계원장을 역임했다. 율사로서 종단의 포교에 일익을 담당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계율은 수행의 기반이 되고 승가생활을 좌표로 작용한다. 계로부터 선정이 생기고 선정으로부터 지혜가 나오므로 계정혜 삼학이 완성될 때 불교가 발전한다. 계율을 받는 것은 개인의 이익은 물론 대중의 통솔과 화합 안락을 위해서 필요하다. 다스리기 어려운 자를 잘 다스리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를 안락하게 하며 믿음이 없는 자를 믿게 하고, 입문자에게 신심을 불러일으킨다. 번뇌와 욕락을 끊어 정법을 오래 보존하게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불교도들에게 수계는 필수다.
수행자가 수지하는 엄한 계율은 불법의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는 최고의 배로도 비유된다. 부처님은 계로서 스승을 삼으라고 했고, 율사의 표징으로 일컬어지는 신라의 자장 율사는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파계하고 100년 동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서릿발과 같은 말을 남겼을 만큼 계율을 강조했다.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며, 율(律)은 부처님의 행이라고 한다. 이는 말과 마음과 행동이 같아야 진정한 수행자이며 설법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광 스님이 율사로 살아온 데는 스승인 경산 스님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스님은 은사인 경산 스님의 언행을 그대로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세월이 흐를수록 스승의 언행과 흡사해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처럼 제자도 스승을 그대로 닮는 탓이다.
후학을 지도하고 있는 은사 경산 스님
스승은 출가자가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구제하겠다는 큰 서원을 이룰 수 없다며 계율에 철저할 것을 명했다. 철저한 수행과 계율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신라의 자장 율사 이야기를 자주 했고, 제자들이 수계를 하고 나면 ‘계는 받아두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데 의의가 있다’며 수행자로서의 자존을 잃지 말고 살아가길 당부했다. 자광 스님이 석사논문을 자장 율사에 대해 쓴 것도 은사 스님의 영향이 컸다.
스승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일대시교(一代時敎)가 선과 교와 율 세 부분에 있으니, 이 세 가지는 세 발이 달린 솥과 같아 하나라도 부러지면 제 구실을 못하듯 출가자도 선과 교, 율의 어느 하나가 결여되면 수행자로서의 제 구실을 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 가운데서도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수행의 본분이고 성불의 길이니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수행도 잘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이 성취된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도 계율을 지키는 것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던 스승이었다. 젓갈을 넣은 김치가 상에라도 올라오면 주지가 불려 가 호된 꾸중을 들었고 홀로 공양을 할 경우에도 가사 장삼을 수하고 발우를 폈다. 공양 시간이 지나면 따로 밥상을 차리지 않게 하여, ‘때가 아닐 때는 공양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계율을 엄격히 지켰다. 육수를 낸 국물에 만 냉면은 손도 대지 않았으며, 여신도와 상담을 할 때에는 방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새벽 세시에 일어나 가사장삼을 수하고 예불을 드렸는데 예불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 여겼던 까닭이다. 공사가 분명해서 개인을 위해서는 공금을 한 푼도 쓴 적이 없으며 지방 출장 때 부득이 여관에 들었을 때도 새벽 세시가 되면 가사장삼을 수하고 예불을 했다. 자광 스님은 이 모두를 젊은 시절 어른들을 모시고 살면서 습관으로 익혔고, 자광 스님 또한 스승의 언행을 그대로 따라하다 보니 율사로서의 정체성을 세울 수 있었다. 율사로서의 삶은 대중포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계율을 지키며 사는 삶이 부처와 가까운 삶이 될 수 있음을 대중들도 느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율사로 살아온 것이 모범이 되어 2015년 3월 17일, 조계종 중앙종회에 의해 호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호계원은 조계종 중앙종정기관의 하나이며 쟁사(爭事)를 해결하는 주체로 사법기관으로서의 권한을 가진다. 중앙종정기관에는 종정, 원로회의, 중앙종회, 총무원, 교육원, 포교원, 호계원, 법규위원회가 있다. 중앙종회는 종단의 입법부라고 할 수 있고 호계원은 사법부에 해당한다. 호계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서 사안이 발생했을 때 최종판결을 하는 자리다.
자광 스님 호계원장 선출
호계원장은 법계 종사 이상의 율장과 청규 및 법리에 밝은 비구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계율의 중요성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온 스님에게 적격인 소임이었다. 호계원장에 취임해서 스님이 가장 먼저 다룬 일은 20여 년 전 종단으로부터 멸빈을 당한 한 노스님의 복원을 결정한 일이었다. 율을 제정하여 지키는 목적은 수행자로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자에게 자발적인 참회를 유도하여 죄를 벗겨주고 청정비구로 돌아가 수행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며, 이를 통해 승가의 청정과 화합을 유지하는 것에 있음을 믿었기에 내린 결단이었다. 동서남북에서 남남끼리 서로 모여 승단을 이룩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이 화합이라며 화합이 잘 이루어질 때 교단과 교세는 날로 신장한다고 가르쳤던 스승의 가르침도 잊지 않은 탓이었다.
과거의 잘잘못보다는 화합의 차원에서 재심 위원들을 설득해 고심 끝에 결정한 일이었으나, 의견이 다른 종단 구성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다. 종헌종법에 따라 신중을 기한 결정이었으나 반대하는 대중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직의 뜻을 밝히고 소임에서 물러났다.
사부대중의 뜻을 받들어 사직하는 것이 자비 실현과 종단 화합을 위한 단초가 되고 앞으로 대중 공의를 모아 소모적인 논의를 끝내길 바라며 전법도생, 중생교화에 매진하기를 바랍니다.
소임에서 물러나며 스님이 종단의 대중들에게 고한 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법도생 중생교화’의 원력을 잊지 않고 종단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스님다운 말씀이었다.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스님에겐 율사로서 종단의 화합과 질서를 위해 최선을 다한 시간이었다.
자광 스님은 호계원장 퇴임 이후에도 대중포교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출처: 불교TV BTN)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