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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섭으로 대중 포교 시대를 열다

수행자가 중생을 제도하고 불법으로 유도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행하는 네 가지 법을 사섭법(四攝法)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보시(普施)·애어(愛語)·이행(利行)·동사(同事)의 네 가지 법이 있다. 보시섭은 중생이 재물을 구하거나 진리를 구할 때 그리고 두려운 마음을 없애고자 할 때 힘닿는 대로 베풀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뜻한다. 애어섭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중생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행섭은 선행으로 중생을 이익 되게 하여 그들을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동사섭은 보살이 중생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깨우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적극적인 실천행을 말한다.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그들의 일 속에 뛰어들고 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을 진리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사섭법 가운데 가장 실천하기 힘든 수행법으로 통한다. “여러분이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음으로 여러분이 있다”는 법문을 늘 해오며 세상에 지혜와 자비를 베풀었던 자광 스님의 포교는 사회적 약자들을 찾아 위로하고 기도하며 도움이 되고자 했던 동사섭의 실천이었다. 1995년 11월, 스님은 군승 대령으로 전역해 다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스님으로 돌아왔다. 당시 총무원장이던 월주 스님이 직접 삭발을 해주었다. 전역 후에 군인연금이 나오니 일반인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교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처음도 중간도 끝도 청정수행자로 남을 것을 다짐하며 살아왔던 스님에게 승가로의 환귀본처는 당연한 일이었다.
반야선원이 세워졌을 당시에는 좁은 이 공간을 법당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제대 후, 국방부에 속한 법당에 방 한 칸을 얻어 잠시 살다가 경기도 용인 완장리에 자그마한 집 한 칸을 마련했다. 가끔 참새들이나 드나드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이었다. 이름을 작왕사(雀往寺)라고 지어놓고 그곳에서 몇 해를 지냈다. 조촐한 곳에서 지내며 때때로 총무원장을 몇 번이나 역임했으면서도 가난한 절에서 지내다 입적한 은사 스님을 떠올리곤 했다. 어느 해 총무원장실로 은사 스님을 찾아갔었다. 상좌들에게 본사는 고사하고 말사 한 군데를 맡기지 않고 있을 때였다. 문도들이 수십 명인 우리 문중도 기댈 근거지는 한 곳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리고 은사 스님께서도 노년에 머무실 만한 교구본사가 있어야 한다고 강하게 얘기했다가 얻어맞을 뻔하고 쫓겨 나왔다. 출가자의 본분은 수행을 철저히 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에 있지 큰 절을 차지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 은사 스님의 말씀이었다. 세월이 흘러 돌아보니 전국의 사찰이 다 내 집이고 수행처라던 은사 스님의 말씀이 옳았다. 만약 그때 은사 스님께서 큰 절이라도 하나 마련해 주어 넓고 편한 데서 살게 되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은사 스님은 총무원장의 소임을 마치고 나서도 비탈진 언덕의 작은 절 적조암에 머물며 손수 화장실을 치웠고, 어느 해 여름에 폭우로 축대가 무너지고 대웅전이 흙과 돌 더미에 뒤덮였어도 다른 절을 구하는 것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은 분이었다. 이런 스승을 사람들은 말세의 보현보살이라고 불렀다. 소신껏 청정한 수행자로 사셨던 스승을 생각하며 작왕사에 머무는 동안 참선을 하고 책을 읽었다. 법문을 청해 오면 잠시 법문을 해주고 돌아왔다. 자신과 오롯이 마주하며 한가롭게 지낸 더없이 완벽한 시간들이었다. 1999년 11월, 여기저기 낙엽이 떨어져 길가에 뒹굴고 있을 때 지금 주석하고 있는 반야선원으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절처럼 생긴 몇 채의 집을 시간을 두고 조금씩 개수하고 법당을 지어 오늘날의 반야선원으로 만들었다. 용인의 군부대 군 법당에 법사로 있으면서 용인이라는 지역과 인연이 되었고, 그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신도가 되었다. 반야선원 신도 가운데에는 예비역 장성들이 많다. 군승으로 25년 동안 포교에 힘쓰다 보니 알고 지내던 전역 군인 및 가족들이 찾아왔다. 함께 수행하면서 공부하자는 데 뜻을 모아 ‘반야선원’으로 이름을 짓고 공부를 하자 신도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반야선원 법당에 모셔진 은사 경산 스님
본격적으로 법회를 열면서 신도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초하루 법회와 관음법회, 지장법회를 열었고, 매달 첫째 주에는 정기 법문 법회를 열었다. 평소 자광 스님을 존경하던 사단법인 예지원 강영숙 원장이 회원 20여 명을 데리고 법회에 참석하면서 법회는 활기를 띠었다. 예지원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법회와 행사를 주관했다. 용인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 반야선원으로 와서 법회를 열었고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다. 매해 동짓날에는 불자 군인 100여 명에게 동지 팥죽을 쑤어 대접하는 행사를 가지며 군 포교의 맥을 이어갔다. 마음의 고향과도 같았던 군 포교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법회가 활성화되면서 신도들이 늘어났고 법당이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들어차자 옆방에까지 앉아서 법회를 보게 되었다. 부처님오신날 등(燈) 접수가 500여 명이나 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스님을 곁에서 본 신도들은 나약하고 게으른 것과는 담을 쌓은 분으로 어떠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모습에 자신을 비추어보며 경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를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불교교양대학도 열었다. 불교의 가치와 세계관을 이해시키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은 부처님의 재세 시부터 오늘날까지 전해진 과제다. 종단교육 체계에 의해 마련된 기본교육 내용에 의거해 불자 예법 및 사찰의 이해, 불교의 이해, 부처님의 생애, 불교 기본 교리, 불교역사와 종단의 이해, 불자의 수행, 불자의 신행생활, 현대사회와 불자의 생활 등을 교육했다.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교육을 받은 신도들은 늘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깨어있으면서 이웃을 돕는 불자로 거듭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외부의 법문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법문과 인과법문, 그리고 비유가 다양하고 적절하며 핵심이 분명하면서도 따스하게 대중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스님 특유의 법문은 금세 소문이 나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용인시와 경기도 곳곳에는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스님의 발걸음이 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인시 불교사암연합회장을 비롯해서, 용인경찰서 경승위원회 경승위원, 안양교도소 교정위원, 경기지방경찰청 경승위원회 경승위원, 경기남부지방 경찰청 경승위원회 경승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생을 위해 포교에 전념하겠다는 출가 서원이 꽃을 피우는 중이었다. 대체로 포교의 분야는 군 포교와 군종교구, 경찰 포교(경승단), 직장직능 포교, 국제 포교, 여성 포교, 상담 포교, 장애인 포교, 교정 포교, 포교사단 포교로 나뉜다. 이들 중 스님의 활동은 국제 포교와 장애인 포교를 제외한 포교의 전 분야에 걸쳐 자취를 남기고 있다. 포교를 수행자의 사명으로 살아온 스님의 신념이 불과 반세기도 안 되어 포교 분야에 두루 공적을 남긴 셈이다.
· 집필자 : 박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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