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군 포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대한불교진흥원이 발족하면서 군 포교 지원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군법당 건립과 불서보급 등의 대한불교진흥원 지원사업은 군 포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각 사찰과 스님을 비롯해 신행단체들이 군법당 건립 및 불서와 신문 보내기, 전방에 위문품 보내기 등의 운동을 펼쳤다. 곳곳에 군법당이 건립되기 시작하면서 군 신도도 증가하고 군법사의 수도 늘어났다.
종단과 대한불교진흥원 그리고 사부대중의 후원과 함께 자광 스님이 지은 법당은 쌍용사, 호국선봉사, 화랑호국사, 계룡대 호국사 등이다. 제3야전사령부 법당 호국선봉사는 세 차례나 주지 법사로 근무했던 곳으로 스님과 인연이 깊다. 1975년 6월에서 1977년 8월까지 대위로 근무했고, 1982년 6월부터 1984년 5월까지 중령으로, 1989년 5월부터 1993년 3월까지 대령으로 근무했다. 제3야전사령부의 관할 구역은 경기도, 인천광역시, 강원도 철원군 일부의 수도권 지역이다. 제3야전사령부는 대한민국 정치와 문화, 경제와 사회의 총 집중 지역인 수도권의 방어 임무를 맡고 있어서 어느 지역보다 중요성이 높다.
호국선봉사는 처음 부임해서 1975년 6월 기공했고 같은 해 9월 30일에 낙성했다. 이후 사령관 공관 이전으로 착수하게 된 호국선봉사는 사령부 영외로 부지를 선정하여 2013년 4월 낙성되었다. 자광 스님은 낙성식에 군종교구장 자격으로 참석했다. 소재지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이어서 자광 스님이 용인 반야선원에 주석하는 계기가 되었고, 현재까지 군법사와 가족, 장병들이 반야선원에 와서 스님에게 수계를 하고 법문을 듣고 있다.
불기 2536년 ‘부처님오신날’ 선봉사 신도들과
계룡대 호국사 창건도 잊을 수 없는 불사 가운데 하나다. 1987년 대령으로 승진해서 육군본부 군종감실 제도과장을 거쳐 3군 군종참모를 역임할 때 이룬 불사다. 1987년에 착공해서 1989년 7월 22일에 완공되었다. 건평 480평, 법당 내부 250평의 면적으로 낙성 당시 단일 법당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논산 호국연무사 건립 불사 이전에 스님이 이룬 가장 큰 불사였다.
호국사가 속한 계룡대는 대한민국의 육군과 해군, 공군 본부가 위치한 통합기지이다. 대한민국의 국방을 실제로 시행하는 최상위 전투기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계룡대 호국사가 지니는 의미는 평시 및 전시 군종 체계를 기획 및 시행하는 실질적 업무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낙성된 뒤 4년 정도 육군과 공군의 통합 법당으로 활용되다가 이후 1993년 7월, 해군 본부의 이동에 따라 해군이 증편되면서 명실상부한 삼군 본부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계룡대 호국사는 군승으로 의욕이 넘치던 시기에 일으킨 큰 불사였다. ‘가장 높은 곳에 가장 크게’라는 원칙에 따라 건립되었다. 군대 포교의 상징인 계룡대 호국사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감회가 깊다. 호국사를 지을 때 동참해 주신 수많은 시주자들의 공덕을 떠올릴 때마다 불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져 옴을 실감하곤 한다. 호국사를 짓고 나서 법당에 가득 찬 군인 불자들을 대할 때마다 군승으로서 느꼈던 보람을 잊을 수 없다.
자광 스님이 법당만 지은 것은 아니다. 원칙대로라면 군법사는 법당을 짓고 군목은 교회를, 군종신부는 성당을 짓는다. 그러나 스님은 임관한 지 얼마 안 돼서 군종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군종목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어느 종교든 올바른 신행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의 포교라고 생각해 오던 스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군종업무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으면 종교 간에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님이 군종 참모를 지낼 때, 한경직 목사를 찾아가 병영 내 교회를 짓는 데 동참하도록 권유해서 장병들에게 교회를 선물한 적이 있다. 올바른 기독교인은 올바른 불교인만큼이나 소중하다는 철학으로 타 종교를 상대로 쉽지 않은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했던 이 일은 종교를 떠나 귀감으로 남아 있다.
스님이 5사단 군종 참모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군대 내 종교시설은 토지는 군대 땅을 사용할 수 있지만 시설은 예산이 많이 소요되는 관계로 민간의 지원을 받는다. 하루는 군대 내 종교시설을 살펴보다가 방치된 건물을 발견했다. 도와주기로 한 교회가 지원을 멈추고 있어 6개월째 공사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단의 군목을 데리고 애초에 도와주기로 했던 서울의 교회를 찾아갔다. 교회관계자를 만나 군대 내 교회의 신축 과정을 설명하고 공사를 재개해 주길 바란다고 하자 교회 예산이 편성되어 있지 않다며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묻는 스님에게 관계자가 신통한 대안을 내놓았다. 교회 원로 목사님의 승낙을 받으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한국그리스도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던 한경직 목사가 바로 그였다. 그들이 일러준 대로 남한산성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거처로 찾아갔다. 스님의 방문을 의아해하는 80대 중반의 원로목사에게 정중하게 합장하고 기독교 신자인 장병들을 위해 짓다 만 교회를 다시 지었으면 한다는 사정을 전했다. 한경직 목사가 미소를 띠며 ‘스님이 교회를 짓느냐’고 반문했다.
“저는 스님이지만 사단 군종참모입니다. 기독교 신자인 장병들을 위해 교회를 지어줄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님의 진심이 원로목사의 마음을 열게 했다. 흔쾌하게 돕기로 약속한 한경직 목사는 교회관계자들에게 신축공사를 재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식을 들은 교회 간부들은 현장을 방문하고 난 다음 최종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산간벽지 내 군대 안의 교회 신축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을 설득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교회간부들의 방문 일에 맞추어 기독교 신자 장병들을 모으고 군악대를 동원해서 그들을 환영했다. 얼마 후 영락교회로부터 예산지원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공병들을 동원해서 신축공사를 재개했다. 스님이 직접 나서 공사를 감독했다. 적극적으로 나서 교회를 짓는 군종참모를 보고 타 군종들은 불교의 포용력과 스님의 리더십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스님만의 포교였다.
교회가 다 지어지자 한경직 목사가 직접 와서 설교를 하는 가운데 헌당식이 열렸다. 영락교회 간부들과 신도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예배를 보지 못한 장병들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꼈다. 이후에도 스님은 배타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어느 종교든 필요한 부분이 있거나 어려운 일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최대한 지원했다. 열린 수행자의 포교방식이었다.
이렇듯 열린 수행자로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타 종교인들의 배타적인 종교관으로 인해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1993년도 국방부 군종실장으로 부임했을 때다. 군대 내 종교 장교의 수를 조사해 본 결과 군목이 300명, 천주교 신부와 불교 군승(법사)은 각 70~80명이었다. 불균형한 숫자가 이상해서 관계자들을 통해 병사들의 종교를 조사해 보도록 했다. 비율이 전혀 맞지 않았다. 즉시 국방부에 군대 내 신자 비율대로 장교의 수를 구성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신자 비율대로 하자면 터무니없이 많은 군목 수를 100명 줄이고 이 숫자를 군승 정원으로 배당해야 한다는 것이 건의 골자였다. 국방부장관이 결제를 해주었다. 그 결과 전 군대 내 종교 관련 장교는 기독교가 200명, 천주교 70~80명, 불교가 170~180명이 되었다.
그런데 며칠도 안 돼서 국방부에서 군목을 줄이고 군승을 늘린다는 소문이 기독교 단체에 퍼진 모양이었다. 매일같이 그들이 국방부 앞으로 몰려들어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국방부 면회실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는 그들 때문에 다른 업무를 볼 수가 없었다. 각 교회에서는 스님인 임봉준 대령이 군종실장이 되더니 군목을 다 죽이고 있으니 구해달라는 기도가 유행할 정도로 반발이 심했다. 기독교계 신문도 일제히 들고일어나 자광 스님이라는 군종실장이 기독교를 박해한다는 글을 실었다. 온갖 욕설과 비난이 난무했다. 당시 데모대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피해 다녔을 만큼 곤욕을 치렀다.
종단이나 불교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고 군승들조차도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대통령의 마지막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외로운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데모대와 기독교계 사람들은 이 결정이 통과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직접 청와대에도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대의가 사심을 이기는 법이다. 기독교 장로인 대통령(김영삼)이 스님의 건의를 인정하고 안을 확정해 주었다. 타 종교인에게 사탄으로 몰렸던 그때의 일을 잘 극복한 결과 불교 군승은 군목에게 숫자를 비롯한 여러 면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겨루며 군대 포교를 활발하게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