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 스님은 군승으로서의 25년 동안을 나라를 지키는 승군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스님이 군승단의 장이 된 것은 중위로 임관해 군승이 된 지 10여 년 뒤인 1980년대 초였다. 군승단장이란 말 그대로 대한민국 군승단체의 대표를 말한다. 옛날로 치면 승장(僧將) 중의 우두머리로 장수들을 이끄는 지위이다. 승장은 스님들로 구성된 군대의 장수를 일컫는다.
자광 스님은 군승단장이던 당시 일본의 정토진종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김수남 법사(해군부단장), 오관지 법사(공군부단장)와 동행한 방문에 일본 불교 관계자들의 대접은 극진했다. 그들의 설명으로 조선시대의 고승인 사명 대사 이후 승장으로서의 일본 방문은 스님 일행이 처음이라고 했다. 스님은 생사를 내려놓고 적지인 일본으로 들어가서 포로 송환교섭을 하고 돌아온 조선 스님의 깊은 수행력과 기개를 아낌없이 보여준 사명 대사를 떠올리며 숙연해졌다고 한다. 개인의 수행은 물론 국가를 위해 온몸을 바쳤던 사명 대사와 같은 수행자의 길을 가리라고 몇 번이나 다짐한 일본 방문이었다.
일본 방문을 계기로 스님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 목숨을 바쳤던 승군들을 떠올렸고, 국가가 환난에 처해있을 때마다 활약한 승군의 역사를 깊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승으로서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진하며 호국을 위해 애쓰리라는 다짐을 점검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것이 군승으로 올바로 살아가는 길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위기에 처했던 임진왜란 때 국난을 극복하는 데에는 승군의 활약이 컸다. 물밀듯이 밀려오던 왜군을 상대해 첫 승리를 거둔 것이 영규(靈圭) 스님 휘하에 있던 승군들이었다. 의병장 조헌(趙憲)이 이끈 700명과의 결사전 끝에 호남지역으로 들어가려던 일본군 1만 5,000명이 무너진 데에는 영규 스님이 이끈 승군 800명의 연합작전이 있었다. 서산대사 휴정 스님과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이끈 1,500명의 승군이 조선군 처음으로 전면전을 벌인 평양성 전투에 나가 싸웠고, 이 승군들이 가장 먼저 한양에 입성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 진주대첩에는 해인사의 신열(信悅) 스님이 이끈 승군들이, 행주대첩에는 전라도 지역의 승군 2,500명이 참전했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장군 휘하에도 승군 1,500명이 있었다. 이러한 치적으로 1605년(선조 38) 4월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대한 기록에는 승군이 34명이나 포함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도 승군의 활약이 컸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 전국의 산성은 거의 모두 승군들이 주둔하는 병영 겸 사찰이었다. 각성(覺性) 스님이 쌓은 남한산성 안의 남한치영(南漢緇營)은 각 도에서 올라온 의승군(義僧軍)이 주둔했고, 북한산성의 북한치영에도 승군이 주둔하며 산성을 지켰다. 이처럼 전국 8도 곳곳에 승군이 주둔해서 조선의 국방을 상당 부분 책임졌던 것이다.
고려시대 승군의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1010년(현종 1)에 거란군이 침입해 서경(西京)이 위기에 놓여있을 때 승장 법언(法言) 스님이 9,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거란병을 공격하여 적병 수천 명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고려시대 승군 활약 가운데 가장 훌륭한 업적을 이룬 것은 거란군을 물리치기 위해 승군이 힘을 모아 만든 팔만대장경 조성사업이다. 국왕(현종)은 대장경을 새겨 외적을 물리치려는 생각으로 현화사를 창건했다. 고려시대 대장경의 의미는 종교적 상징과 더불어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었다.
대장경 조성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부처님의 힘이 드러난 것처럼, 거란군이 물러갔고 국경이 조용해졌다. 이에 고무된 현종은 『고려대장경』을 간행하라는 명을 내리고 대장경을 간행하기 위해 반야경보(般若經寶)를 설치했다. 이 반야경보에 현화사 승려를 비롯한 당시 승려들이 대대적으로 참여해서 『대반야경』·『화엄경』 등을 먼저 판각하기 시작했다. 1011년(현종 2)부터 시작된 이 대장경 판각 작업은 20년 동안 계속되었으나 다 마치지 못해 문종(1046-1083) 초기에 다시 재개해 약 40년 만인 1087년(선종 4)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 무려 76년에 걸쳐 완성된 이 장경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고 부른다.
오랜 시간 동안 장경을 판각하는 실무 작업을 승려들이 맡았다. 국책 사업으로 승려들에 의해 완성된 『초조대장경』은 대략 570함 6,000여 권이다. 여기에는 『대반야바라밀다경』·『대방광불화엄경』 등 경(經)·율(律)·논(論)의 3장(藏)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중국의 송나라에서 먼저 판각한 『칙판대장경』을 모델로 했으나 그 장경의 오류를 수정하고 보완해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대장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 승려들의 호국정신을 통한 대장경 사업은 『초조대장경』에 그치지 않았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은 『초조대장경』을 결집할 때 누락된 것을 따로 모아 『고려속장경』을 만들었다. 그런데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었던 이 초조대장경과 고려속장경이 1232년(고종 19) 몽골군의 침입 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판각이 완료된 지 약 150년 만에 불에 타버리자, 1236년에 대장도감을 새로 설치해 다시 대장경 판각 작업을 시작했다. 『초조대장경』이 거란을 물리친 것처럼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다시 승려들이 대거 나섰고, 강화도 선원사를 판각 장소로 정해 대장경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1236년에 시작된 이 판각 작업은 약 15년이 걸려 완성되어 『팔만대장경』으로 태어났다. 이 『팔만대장경』 판각의 실무책임자는 개태사의 승통 수기(守其) 스님으로 『초조대장경』을 기본으로 하여 송나라와 거란에서 만든 대장경을 구해 교정하고, 빠진 것을 찾아 넣어 『초조대장경』보다 훨씬 완벽한 대장경으로 만들었다. 『팔만대장경』은 오탈자가 거의 없는 어느 나라 대장경보다 완벽한 대장경으로 평가받는다.
『초조대장경』으로 시작해 『속장경』과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지는 경판 제작은 1011년에서 1251년까지 외적의 침입으로 고려가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240년의 긴 세월 동안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루어진 대규모 국책사업에 참여한 승려들의 값진 노력은 불멸의 『팔만대장경』을 탄생시켰고, 1962년 국보 제32호로 지정되게 하였으며, 2007년에는 세계기록 유산으로 지정되는 개가를 이루어냈다. 군승으로 살아온 자광 스님에게 『팔만대장경』의 의미는 무엇보다 깊고 크다. 『초조대장경』과 『팔만대장경』의 판각 초기부터 보관하는 데까지 수많은 승려들의 호국정신이 스며있음을 수없이 돌아보며 살아왔다.
1964년 3월, 동국대학교에서는 조계종 3대 사업의 일환으로 역경원(譯經院)을 설립해 『한글대장경』 번역 사업을 시작했다. 1965년부터 매해 8권씩 『한글대장경』을 간행하기 시작했고, 1976년에는 동국대학교에서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해서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과 주소(註疏), 번역자와 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 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1967년부터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기 시작해 2001년에 『한글대장경』318권을 완간했다. 자광 스님은 고려시대 승군으로부터 시작되어 완성된 『팔만대장경』의 의미를 불교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에서 물려받아 『한글대장경』으로 완성시킨 일을 커다란 자긍심으로 여긴다. 동국대학교 이사장을 지내는 동안에는 이를 바탕으로 동국대학교가 세계적인 인문학의 전당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기도 했다.
자광 스님은 이러한 승군의 역사를 꾸준히 공부하면서 국가의 수호는 물론 불교를 수호하는 승장이 되기를 발원했고, 이는 장병들에게 호국사상을 바탕으로 한 불교를 포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국방부 군종 전반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 군종참모와 군종감을 역임하면서도 승군의 역사를 연구하며 국가에 대한 승군의 헌신을 잊지 않고 포교에 임하려 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90년에는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훈했다.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