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포교의 개척자라 불리는 자광 스님이 걸어온 길은 사명감과 헌신, 열정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에게 군 포교의 개척자라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스님이 이룬 수많은 업적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였으나, 독신 비구로서 청정 계율을 지켰고 무엇보다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었다. 한평생 스님은 중생 모두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부처로 대하는 시선을 거둔 적이 없는 자비보살이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어려움에 처한 중생들을 따스하게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준 관세음보살이었기에 스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스님의 자비를 잊지 못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자광스님과 함께 했던 장병들도 자신들을 귀하게 대하며 용기와 위로를 주었던 스님을 관세음보살과 같은 군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8년 11월, 1기생으로 5명의 군종장교를 선발하면서 최초로 군승제도가 시행되었다. 5명의 1기생 중 한 사람만 육군본부에 남고 네 사람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베트남에는 주월사령부를 비롯해 백마·맹호·십자성(군수지원단) 등 네 개의 큰 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그곳에 한 명씩 군승이 배치되었다. 육군본부에 남은 한 사람은 2기생 모집과 군수행정의 임무를 맡았다. 이처럼 군승의 역사는 베트남 파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승의 파견은 전술적인 효과도 거두었다. 베트남이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군법사가 파견돼 지방 불교와 합동 법회를 열고 불교와 관련된 여러 행사를 주관한 것이 주민들과 일체감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군 법사 3기생 중위로 1970년 임관한 스님은 2년 뒤인 1972년 군수지원단인 십자성부대에 배치되어 베트남 남동부 푸칸 주에 위치한 나트랑 불광사에 머물렀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72년에 가을에 가서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돌아왔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시기는 공식적으로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다. 베트남에 도착해 보니 월남군과 월맹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법회를 열어 참전 장병들을 위로하고,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염불한 다음 극락세계로 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군승의 역할이었다.
전쟁터에서의 포교는 따로 없었다.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전쟁터로 나가는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위로와 안심을 주는 게 전부였다. 야전병원을 찾아 부상병들을 위로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켜 주는 일도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때로는 비전투요원의 군승 신분이지만 병사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전투에 나가는 트럭에 함께 탑승하기도 했다. 수류탄을 장착하고 차에 올라타면 장병들은 우리 트럭에 스님이 탔다며 환호했다. 전투를 하러 나가는 장병들은 타 군종 장교보다 스님들에게 의존을 많이 했다. 전투요원이 아닌 군종 장교가 전투에 참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스님은 중생과 고통을 함께 하는 지장보살과 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안심 섞인 병사들의 환호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스님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수행자는 중생들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든 순간이었다.
1972. 베트남 십자성부대 불광사
전쟁 중의 베트남은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었다. 모든 곳이 위험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도 도반과의 만남과 법담은 있었다. 도반과의 만남이 참전해 있는 스님에게 잠깐의 휴식이었다. 군수부대가 주둔해 있던 베트남의 지방 도시 나트랑에는 절들이 많다.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베트남의 수행자들은 정진을 깊이 했고 조국의 평화를 기원하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자광 스님이 있던 부대에 가끔 젊은 베트남 스님 한 분이 들렀다. 자연스레 도반이 된 그 스님을 따라 어느 한 절에 갔다가 죽음에 직면한 일이 있다.
마을에 장교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나타난 것을 알고 나타난 월맹군들이 들이닥쳐 총을 겨누었다. 긴박한 순간에 그 절에 살던 노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군복을 입었지만 우리 절을 찾아온 스님”이라며 총을 거두라고 했지만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승려의 사회적 위치는 월남군과 월맹군을 막론하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가사장삼 대신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은 사람이 군인 신분이 아닌 스님이란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스님인 이분을 총으로 쏜다면 자네들은 지옥에 가는 것을 면치 못할 걸세.”
전쟁이라는 불행의 장애가 그들을 묶어놓았을 뿐, 월맹군 이전에 그들은 순박한 불제자였다. 노스님의 조용한 타이름에 겨누고 있던 총구를 내렸다. 그래도 긴가민가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언제 다시 총을 겨눌지 모르는, 온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은 채 자광 스님이 그들을 향해 합장하고 차분히 말했다.
“승려는 어떤 순간에도 부처님 앞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 계신 스님들과 똑같은 스님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싶습니다.”
합장을 한 채 정성을 다해 『반야심경』을 염송했다. 진실한 마음이 만국의 공통어이듯 『반야심경』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진심의 언어다.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열아홉 행자시절에 그토록 자유를 찾아 절실한 마음으로 외웠던 『반야심경』만이 있을 뿐이었다. 모양과 생각이 모두 텅 비어있으니 지금 이 순간도 지나면 실체가 없는 것이다. 바람이 잦아든 호수처럼 마음이 고요해졌다. 이러한 마음이 전달된 것인지 『반야심경』을 외우는 동안 그들도 조용히 듣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불교 신앙이 생활화되어 있다. 불심도 깊고 순박했다. 전쟁이 그들을 갈라놓았고 정신을 황폐화시켰을 뿐이다. 『반야심경』이 끝나자 그들은 곧 합장을 하고 돌아갔다. 그들이 들이닥치자마자 군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적군으로 오인해 총을 쏘았더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장병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때가 30대 중반이었다. 젊은 나이에 생사가 오갔던 그 전쟁터가 두렵지 않았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스님은 아무 것도 지닌 게 없는 승려는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죽는다 해도 상관없는 존재라며 더욱이 명분이 있는 죽음 앞에서는 두렵지 않다고 답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부상자는 물론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수없이 천도재를 지내면서 느낀 심정은 어땠을까를 묻는 이들에게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며 이렇게 답한다.
전쟁에서 수천 명의 우리 병사들이 죽었는데, 스님은 왜 살아 돌아왔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죽었어야 내 역할을 제대로 한 것입니다. 조국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이 죽은 후에 내가 책임진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목탁을 치고 염불하면서 극락세계로 가라고 기도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어요. 부끄럽지요.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2차 대담에서(2022.7.12.)
1년 남짓한 베트남 참전 기간은 치열한 수행의 현장과도 같았다. 생사가 하나임을 체험한 순간이기도 했고 조국과 자유 수호를 위해 싸웠던 장병들을 저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뼈아픈 시간이기도 했다. 30대 중반에 겪었던 그 시간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군 포교를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자유를 누리게 해 준 조국에 왜 감사해야 하는지를 젊은 장병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수호하는 젊은 장병들에게 군인의 생사관과 국가관을 확립시켜 주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군 사령관에게 영현봉안소를 안내하는 자광 스님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