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종장교는 종교와 교육, 포교 분야를 다루는 역할을 한다. 인격지도와 종교교육을 통해 장병들의 군 생활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고 군 복무 의욕을 고취시킨다. 또 장병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한 상담이나 대민사업 등을 수행하여 군과 민의 교량 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종교와 신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특수성을 제외하고는 정신전력과 사상관을 확립한다는 측면에서 정훈장교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나, 이념적인 측면보다는 장병들의 개인 생활에서 중요한 실제적인 일들을 통해 정신전력을 강화하고 있다. 군종장교는 연대급 이상 부대에 배속되어 신앙생활의 장을 제공하고 법당을 운영하고 수계식, 상담에 응한다.
자광 스님은 1968년 군승 3기로 들어가 군 포교를 시작했다. 군종장교로 처음 배치된 곳은 춘천 군단급 부대였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군 포교는 많은 난관 속에서 시작되었다. 타 종교 군종들의 압력을 견뎌야 하는 고충도 있었다. 군승의 출발이 17년이나 뒤늦었던 관계로 인해 계급과 군종 수의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갈등으로 투쟁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그것을 극복하는 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자광 스님의 대인관계 친화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그 친화력이 군대에서도 빛을 발했다. 더 나아가 불교의 포용력을 발휘해 늘 겸손한 자세로 대인관계를 유지했다. 멀리서 군목이나 천주교 사제가 나타나면 허리를 굽히고 합장했다. 그렇게 거리를 좁혀가며 가까워졌다.
타 종교는 단체 활동이 잘 되어있었다. 군인 가족들이 뭉쳐 부대에 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위문품도 주었다. 물량과 인적 공세를 당해낼 수 없었다. 사람에 대한 진정성을 잃지 않고 대처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평등과 자비를 설했던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동했다. 매사에 겸손했다. 차츰 주변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불교를 고차원적인 종교로 받아들였다. 장병들은 물론 상당수의 지휘관들이 친 불교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군 포교 초기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법당 등 종교시설이 없었다는 것이다. 막연한 가운데 군대의 폐 천막을 얻어 천막을 치고 법당으로 사용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지휘관의 허용 하에 군 창고나 식당을 법당 삼아 법회를 열었다. 식당의 식탁 위에 이동식 불상을 놓고 일요일마다 법회를 열었다.
한 주 단위로 운영되는 군의 생활과 규칙에 맞게 일요일에 정기법회를 열었다. 오늘날 많은 사찰에서 시행하고 있는 일요정기법회의 효시였다. 군 법당이 일요정기법회를 최초로 시행했다는 것은 오늘날 군불교가 현대 한국불교에 남긴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정기법회의 기본 틀은 초기 군 법사들이 연구 개발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일요법회에서는 장병들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정신의 안정을 위한 설법이 주를 이루었다. 찬불가와 설법이 중심이 된 일요법회를 정착시키는 가운데 종단에 의뢰해서 『국군법요집』을 만들었다. 한국불교 현대포교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법정 스님과 광덕 스님 등이 참여했다. 군승들이 참여해서 한문 중심의 어휘들을 젊은이들에게 맞는 현대어로 바꾸었고,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첨가, 수정한 법요집이 세상에 나왔다. 주중에는 각 부대에 다니면서 인격지도와 종교지도를 하는 교관으로 활동했다. 목사와 신부, 스님이 1시간씩 인격교육을 담당했는데, 호국불교와 인과응보 사상을 전하는 군승이 단연 인기였다.
장병들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먼저 불교의 호국불교 정신을 얘기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승군들이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던 역사를 알렸다. 제도권 밖에서 계급도 보수도 없이 자발적으로 성을 쌓고 승군에 동원되어서 적을 물리치는 일에 생명을 걸고 나선 이들이 스님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교육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인상을 주었다. 유일신 사상을 가진 타 종교에 비해 호국불교 정신을 내세운 게 포교에 효과적인 작용을 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이 된다는 의미에서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강조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정신을 바탕으로 설법을 펼치자 젊은 군 장병들이 호응하며 불자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호응을 바탕으로 법당을 짓기 시작했다.
자광 스님이 지은 첫 법당은 첫 근무지인 춘천군사단에 있으면서 지은 쌍용사다. 전임법사가 1970년 5월 20일 대웅전을 기공하고 나서 전임한 뒤 스님이 주지 법사로 부임해 완성했다. 제2군단 쌍용사가 속한 쌍용부대는 제1야전군 사령부 예하 육군 군단으로 강원도 춘천에 있으며, 예하 부대는 화천과 홍천 일대 중동부 전선을 사수하는 최전방 부대이다. 1970년 9월부터 1972년 9월까지 2년 동안 근무하면서 춘천에서 화천 부대까지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오토바이에 매달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군 정신전력 향상을 위한 신앙운동에 직분을 다했다.
법당 옆에 장병 상담소를 설치해 놓고 고충이 많은 장병들을 위해 상담하는 것도 군승(군법사)이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스님은 상담에서도 특유의 부드러움과 따뜻한 위로로 장병들의 마음이 안정을 이루게 했다. 법회와 포교활동, 상담시간 외에 나머지 시간은 간식을 마련하러 다니는 데 할애했다. 지역 사찰에 도움을 얻어야 장병들의 간식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몇 박스의 라면, 몇 백 개의 빵을 얻으러 사찰을 방문했다. 군대 옆에 있는 절들은 1년 예산 가운데 군 포교비용을 따로 떼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군승이 나타나면 주지가 숨어버리는 절도 있었다. 비구는 본디 얻으러 다니는 자가 아니던가. 본분을 다했다.
타 종교보다 17년이나 늦게 출발한 군 포교는 스님을 비롯한 군승들의 정성 어린 노력으로 빠르게 성장해 나갔다. 1970년 11월, 육군 2군단(춘천)의 불교장교회가 만들어졌다. 회원이 180명인 최초의 간부불자모임이었다. 매월 월례법회를 열고 법당을 후원하며 불우아동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듬해인 1971년에는 육군의 모든 장교회를 총괄하는 육군불교장교회가 발족되었다. 연이어 해군장교회와 공군장교회가 결성되었다.
한 중대가 전원 수계를 받고 불자가 되는 부대도 생겨났다. 1973년에 창설된 화랑중대는 최초의 불교부대로 초기 부대원 중 85%만 불자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불자가 되었다. 이 부대는 수요일과 일요일에는 예불로 점호를 대신했고 화랑오계를 수지했다. 일요일과 수요일에 정기법회를 열었으며 사고 없는 모범부대로 유명했다. 짧은 시간 안에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군대에는 교육기관이 많아요. 그곳에서 근무하는 군승들은 출중한 사람으로 선발했고, 종교시설도 타 종교에 비해 잘 지었어요. 한동안 교육기관을 중점적으로 포교했습니다. 그곳에서 교육받고 나온 장병들은 자연히 포교가 잘 되었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포교에 매진하다 보니 10년이 안 되어 군 포교가 눈에 띄게 발전했어요. 타 종교 군종들보다 몇 배는 더 뛰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군 포교가 정착되었죠.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2차 대담에서(2022.7.12.)
육군사관학교 간부들과 함께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