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 스님의 생애 중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군 포교였다. 1970년 3기 군승 중위로 임관한 이후 육해공군 군승단장과 3군 군종참모를 지냈고, 1995년 6월 군대 내 군종 업무를 총괄하는 국방부 군종실장을 역임했다. 스님은 군 포교 역사의 산증인이자 군 포교의 초석을 세운 보현보살로 알려져 있으며, 불모지나 다름없던 군대 포교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군 포교는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국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다. 아울러 직업 군인과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포교활동 또한 군 포교의 중요한 분야에 속한다. 우리나라가 징병제도를 실시하고 있음에 따라 국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군 포교는 포교 영역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68년 1기 군승을 베트남 전쟁에 파송하면서 군승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반세기가 지났다. 5명으로 시작한 군승이 150여 명으로 늘었고, 3곳에 불과했던 군 법당은 400여 곳이 되었다. 2009년 전(全) 군승의 독신비구를 선언했고, 2014년에는 비구니 스님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973. 제3사관학교 10기 수계식. 경산 스님을 계사(戒師)로 모셨다.
자광 스님이 군승으로 군 포교에 뛰어든 데에는 은사인 경산 스님, 그리고 통합종단의 종단방침 실행과도 연관이 있다. 당시 종단에서는 포교, 역경, 도제 양성을 구체적인 종단방침으로 내세웠다. 군승제도는 종비생제도와 함께 통합종단에서 총무부장과 총무원장을 역임했던 경산 스님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고 성사시킨 제도다. 종비생으로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입대해서 제대를 몇 달 남기고 있을 때 은사의 권유로 군승으로 전환했던 것이 스님의 포교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군 법사로 있으면서 군인들에게 포교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라는 게 은사스님의 명이었다.
군종(軍宗)은 장병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군의 정신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된 병과다. 군대 안에서 종교적 활동을 담당하기 위해서 도입된 제도로, 한국전쟁 때 일부 종교 단체가 장병들의 신앙 활동을 돕기 위해 자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도화되었다. 군종장교는 각 지휘관의 종교적, 인격적 부분을 담당하는 참모로서 의무병과 같이 비전투요원이다. 장교는 소속된 종교에 따라 군법사(불교), 군종신부(천주교), 군목(개신교), 교무(원불교)로 불린다.
불교의 군승제도가 실시된 것은 1968년 5월이었다. 1951년 불교종군포교사회를 결성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월남전에 우리 군이 참전하면서 불교국가인 베트남에 군승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실시되었다. 군승제도가 실시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종단에서는 1964년 3월에 군승제도 허가를 정부에 청원했다. 개신교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군종장교를 두기 시작했고, 가톨릭사제도 임관해 17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중이었다. 포교의 당위성을 내세우면서 정부에 군승제도를 청원한 이후 종단을 비롯해 많은 불자들이 청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1975. 경산 스님, 3군사령부 법당 기금 전달
범 종단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대 포교를 독점하고 있던 타 종교의 반발이 극심했다. 이때 총무원장인 경산 스님을 비롯해 숭산·혜정 스님 등이 수시로 국방부를 방문하고 국회와 청와대를 찾아 군승제도를 확립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대한불교조계종 청년회 등이 나서서 시위에 앞장서기도 했다.
때마침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이 총무원장인 경산 스님을 찾아와 군승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 호재가 되었다. 채명신은 불교국가인 베트남에 군승을 속히 파견하여 베트남 국민의 마음을 수습하도록 하는 것이 월남전을 승리로 이끄는 방책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군승제도를 실시할 것을 촉구했다.
총무원장 경산 스님은 사이공 불교본부에서 한월합동 법회를 개최했다. 이 법회에 월남 불교지도자 틱탐차우 스님을 비롯해 1천 명의 베트남 불교신자와 한국군 불교신자 380명이 참석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이어진 결과, 마침내 1968년 7월 4일에 국방부 및 국회가 합의해서 조계종을 군종장교 요원 추천단체로 지정했다. 청원 4년 4개월 만에 군승 제도의 실현이 이뤄진 것이다.
배타적인 타 종교의 반발 속에서 황무지에서 출발한 군승제도는 실현 초반부터 난항을 겪었다. 어렵게 군승제도를 만들어놓았으나 군법사로 갈 사람이 없는 실정이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 조계종 총무원장이 추천하는 승려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이러한 때 군 복무 중이던 자광 스님이 군승으로 전환해 중위로 임관된 것이다.
군승제도가 시행되고 2년 뒤인 1970년에 중위로 임관하면서 25년의 군 포교생활이 시작되었다. 군승을 권유했던 은사스님조차도 3년이면 돌아올 줄 알았다고 했을 만큼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군승으로 있어보니 젊은 장병들이 있는 군대는 포교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이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25년 동안 군 장병들을 상대로 포교를 하면서 청춘을 보냈다.
나는 승군이었다. 25년을 호국에 대한 일념으로 군문(軍門)에 바쳤다. 육해공군의 군종 업무를 총지휘한 적이 있으니, 옛날로 치자면 승장(僧將)이었다.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방부 군종 전반을 담당하는 책임자로서 육해공군의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군 종교 업무를 총 지휘했다. 늘 서산대사 휴정 스님이나 사명당 유정 스님을 잇는 이 시대의 승장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그분들을 뒤따라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살아왔다.
-자광 스님, 『멍텅구리 부처님』(동국대학교 출판문화원, 2021)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