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법도생 불영자광(轉法度生 佛影慈光)’
이 여덟 글자는 자광 스님이 미리 써둔 위패(位牌)의 내용이다. 포교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수행자다운 문구다. ‘전법도생’이라는 이 네 글자가 스님의 일생을 관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법은 곧 포교다. 출가자는 이를 위해서 수행에 매진하는 것이라 여겨왔다. 출가수행자의 삶에서 가장 보람 있던 일이 25년 동안 혼신을 다해 군인 장병들을 상대로 펼친 포교였다.
1970년 스물아홉 살에 군승 중위로 임관된 뒤 얼마 안 돼서 베트남전에 다녀왔다. 그 후 마흔 살에 육해공군 군승단장이 되어 계룡대 호국사를 창건했다. 1987년 마흔여섯 살에 대령으로 승진해서 3군 군종 참모를 역임하며 불모지나 다름없던 군대 포교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95년 6월, 군대 내 군종업무를 총괄하는 군종실장을 역임하고 전역한 다음 종단에 복귀했다.
베트남 불광사 수계식 장면, 1972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은사스님이 조심스레 군승 얘기를 꺼냈다. 어렵게 군 포교를 위해 군승제도를 만들어놨는데 군법사로 갈 사람을 찾기 힘들다면서, 총무원장인 자신의 상좌부터 보내야 면목이 서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군승제도는 경산 스님이 종비생제도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 통과시킨 제도였다. 1968년 7월 4일에 정부가 조계종을 군종장교 요원 추천단체로 지정하고 이를 종단에 통보하면서 실현된 제도다. 종단에서 1964년 3월에 군승제도 시행허가를 정부에 청원한 이후 4년 동안 많은 난관이 있은 후였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총무원장이 추천하는 승려만이 군법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당시에는 그런 자격을 갖춘 승려가 많지 않았고 자격이 되어도 가려고 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군 포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제대를 앞두고 있는 병장에게 은사스님의 제안은 결정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자광 스님이 머뭇거리자 경산 스님은 군대를 제대하면 포교 전선에 뛰어들 텐데, 지금 황무지나 다름없는 군 포교를 해보면 무엇보다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간곡한 은사스님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군승으로 임관했다. 스물아홉 살이었고, 은사스님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군 포교를 시작해 보니 바로 잘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게 바로 내가 할 일이다. 여기서 열심히 포교해서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군대는 포교의 대상이 되는 젊은이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포교의 황금어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나 중고생 포교와 비교했을 때, 비슷한 또래에 한 곳에 모여 있는 청년들은 조금만 노력해도 쉽게 법당을 찾았다. 타 종교의 배타적인 시선과 변변치 않은 법당 등 열악한 환경에서 시작했지만 불자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포교에 대한 열정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장차 나라를 이끌어나갈 주역인 젊은이들에게 불교를 잘 가르쳐야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삼귀의와 찬불가를 가르쳤고, 월급을 모아 기본적인 불교책자를 구입했다. 법당에 나오는 군인들에게 반드시 수계를 했고 법명을 주어 사회로 나가게 했다. 무엇보다 법문 준비를 철저히 했다. 고된 훈련으로 지쳐있는 장병들이 정신을 바짝 차리는 시간이 5분 정도임을 감안했다. 그 시간 안에 불교의 핵심 사상인 인연법을 짧게 요약해서 들려주려고 노력했다.
인간은 인과응보의 법칙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를, 나쁜 일을 저지르면 나쁜 결과를 얻게 된다. 열매를 얻으려거든 씨를 뿌려라. 선을 심으면 복을 받게 되고 악을 심으면 재앙을 받게 된다. 씨를 심지 않고는 열매를 얻지 못한다.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면 복은 스스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인과응보 사상만 제대로 가르쳐주어도 세상이 바로 설 것 같았다. 또 하나 강조했던 것은 ‘불교는 창조신을 믿지 않으며 자신이 부처로 살아가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두 가지 핵심 사상을 잠깐 들려주고는 나머지 시간은 쉬게 했다.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짬이 필요했던 그들에게 법회는 편안한 휴식시간이었다.
초기엔 천막법당에서 법회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군대가 미군정(美軍政)을 본떠 만들어진 관계로 모든 종교 활동이 기독교식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불교의 군 포교는 기독교나 타 종교에 비해 17년이나 늦어 있었다. 법당이 있을 리 없었다. 부대장의 허락을 받아 평평한 땅에 천막을 치고 비닐 깔판을 깔고 의자를 빌려다 법당으로 사용했다. 그런 열악한 환경의 천막법당에 장병들이 몰려들었다.
병사들이 법당으로 와서 군화를 벗어놓고 법당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지 뒤에서 합장을 하고 나서, 여기저기 벗어놓은 군화를 정리해서 바로 놓았다. 법회 날에는 군복 대신 장삼을 입고 함께 찬불가를 부르고 법문을 했다. 주머니를 털어서 간식을 먹이고 법회를 보는 것이 군승의 일상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화장실 청소부터 법문 준비, 간식 준비 등을 하고 장병들이 법회를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정성을 다했다.
불자가 된 장병들에게 불교만 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30대 초반, 베트남전에 다녀오고 나서는 젊은 그들에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긍지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더 많이 했다. 자유분방함 속에서도 질서를 지켜가면서 국가를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는 것이 민주국가에서 사는 국민의 의무이며 보람이라고 가르쳤다. 소년 시절에 혹독한 전쟁을 경험하고, 30대 초반에 군승으로 생사를 넘나들던 베트남전에 참여했던 스님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시체를 싣고 온 헬기가 법당 뒤에 착륙하면 가사장삼을 꺼내 입고 법당에 들어가 죽은 장병들을 위해 염불한 다음 시체를 꺼내 소대원들과 염하고 묶어서 냉동실에 넣고 다시 염불하는 일이 베트남전에 참여한 군승의 중요 임무였다. 냉장고 서랍을 열어 시체를 집어넣고 염불하는 일을 1년 동안 하고 나니 때로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분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려 불행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임을 경험했기에, 젊은 군인들에게는 민주국가에서 전쟁 없이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자 군부대장들이 스님을 탁월한 군법사로 신뢰했고, 개인적인 고민이 있는 장병들을 주로 스님에게 보내 상담하도록 했다.
장례식 집전
다양한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병사들에게 인간에게는 퍼내고 퍼내도 다 쓸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있으므로, 진심을 다해 열심히 살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내며 그 마음의 실체를 알고 다루고 나누는 일이 불교라는 것을, 그 마음에서 지고의 지혜와 따뜻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을 가르쳤다. 시비 분별을 일삼으며 불행을 자초하는 중생의 안목만 거두어들이면 그들은 이미 완전한 존재였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깨우치고 살기를 기도했다.
군승으로 있는 동안 생사를 오가는 베트남전에 다녀왔고, 여러 채의 군 법당을 짓기도 했다. 군종 참모로 있을 때는 군대 내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해서 종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등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군승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1993년 군종실장으로 있을 때는 군대 내 신자 비율에 따라 기독교 군목 보직을 줄이고 군승 보직을 늘릴 것을 국방부에 건의했다. 장관의 결재까지 받은 이 일 때문에 기독교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지원했다. 배타적인 종교관을 버리고 서로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하며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자비보살’의 원력을 잃지 않은 수행력 때문이었다.
수십 년 동안 군승으로 지내다 보니 여든이 넘은 지금도 스님은 군승으로 착각하며 사신다. 법회에 신도 한 사람만 오더라도 고마움에 합장을 하고 자신도 모르게 헝클어진 신발을 바로 돌려놓는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챙겨 먹이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해 스님이 주석하시는 절에 다니러 갔던 사람들의 손에는 언제나 무엇인가 들려있다.
중위로 시작해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25년 동안 수계법회를 열어 계를 준 장병이 4만 6,000명, 장병을 상대로 한 법회와 설법이 약 4,600회에 달한다. 타종교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던 군승도 100여 명 정도 더 늘려놓았다. 이 세월은 자광 스님의 팔십 인생 가운데 가장 보람된 시기였고, 당신의 법명 그대로 ‘자비의 빛’을 마음껏 발산한 눈부신 시간들이었다. 자광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기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고 보살의 마음으로 젊은이들을 사랑했다.
국군 장병에게 수계 법문을 하는 자광 스님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