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 스님이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1964년은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다음 해였다. 통합종단이 출범하자 총무원 집행부가 구성되고 포교와 역경, 도제양성을 종단 방침으로 삼았다. 정화를 추진했던 이유는 조선조 5백 년 동안의 불교 배척과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으로 불법이 쇠퇴하고 스님들의 자질이 낮아져 지도적 위치를 상실한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자는 데 있었다. 그 구체적 방안이 오늘날까지 종단의 기본 방침인 도제양성, 즉 승려교육과 포교, 역경이었다.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3대 사업을 통해 한국불교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종비생제도는 승려교육의 일환으로 제정된 제도였다. 1963년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한 경산 스님은 인재를 양성해서 적재적소에 잘 써야 종단이 화합하고 나라가 발전한다는 소신으로 대학 발전에 힘을 쏟던 중이었다. 당시 동국대 총장은 김법린(金法麟)이었다. 김법린 총장은 범어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광복 후에는 불교계의 정화 발전에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다. 프랑스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문교부장관을 지낸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이사장인 경산 스님을 도와 종단의 3대 사업을 추진하고 학교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시 도처에서 대처승들의 숫자에 밀려 절을 빼앗기는 일이 많은 상황을 알게 된 김법린 총장이 이사장인 경산 스님에게 스님들이 승가의 전통교육과 현대교육을 함께 받지 않으면 한국불교에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고 기숙사도 마련해서 무료로 공부를 시키는 게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고 한다.
경산 스님은 김법린 총장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종단을 운영한 경험으로 볼 때, 교학 체계가 취약한 선방 수좌들에게 체계적으로 교학을 공부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유학을 다녀온 대처승들에 비해 참선만을 익힌 비구승들의 행정과 포교 등 여러 면에서의 불리함을 보면서 현대교육의 절실함을 느껴왔던 것이다. 당시 총무원장이던 청담 스님과 총무원 교무부장 직을 맡고 있던 숭산 스님도 시대변화에 따라 승려교육을 제도화시킨 종비생제도에 적극 찬성하고 힘을 실어주었던 인물이다.
동국대학교 종비생 1기 스님들과 함께
자광 스님은 해인사를 떠나 동국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본고사와 체력검사 등을 거쳐 인도철학과에 합격했다. 그렇게 스물네 살에 대학생이 되었다. 1963년 12월에 종비생제도가 발의, 추진되어 다음 해인 1964년에 첫 종비생으로 동국대학교에 들어간 스님은 모두 21명이었다. 인도철학과 종비생 1기에는 탁도안·월탄·현해·태경 스님 등이 있다. 종비생 1기 스님들은 종단의 미래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책임감과 종단에 대한 고마움으로 종립학교인 동국대에서 누구보다 모범적인 승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수와 일반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는 수행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계율을 지키며 공부에 힘썼다.
스님은 동국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거처를 적조사에서 화계사로 옮겼다. 적조사는 서울 성북구에 있는 자그마한 절로 은사스님께서 총무원 일을 보면서 머물던 작은 암자 같은 곳이었다. 화계사에서는 화계사 큰방(선방)에서 비구 열다섯 명이 단체로 함께 살았다. 동국대학교 이사이자 화계사 주지였던 숭산(崇山, 1927-2004) 스님이 흔쾌히 종비생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 주었다. 차츰 학년이 늘어나며 학생수가 4,50명이 되자 총무원에서 절 밑에 있던 식당을 사서 동국대학교 종비생 기숙사로 만들어 ‘백상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계사에서 독립해 나온 셈이었다.
계행을 철저히 지키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살림에도 종비생제도를 만들어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는 종단의 빚을 갚으려면 착실하게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 중생 교화의 길을 가야 한다는 목표에 추호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로 길이가 30센티도 안 되는 조그만 책상에 책을 놓고 기숙사 방에서 밤낮으로 공부만 했다. 도반들과 밤새워가며 포교문제와 종단의 발전, 그리고 바람직한 승가상에 대해 토론하는 날들도 많았다. 공부에 충실하고 모범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수행자의 위상을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철저히 조심했다. 스님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라 때로 거칠게 대하는 교수들에게도 자존심을 묻어 버린 채 힘든 고비를 넘기며 공부에만 충실했다. 그것이 고행정진이고 수행이라는 정신이 철저했다. 기숙사 백상원에서의 규율은 군대생활보다 더 철저하게 이뤄졌다. 등교와 하교를 선후배 모두 함께 했고 빈 강의실에서 절에서 싸 온 도시락을 먹었다. 강의실을 옮겨 다닐 때나 교정을 걸어 다닐 때도 가사장삼을 입은 채 두 줄로 서서 다녔다.
계행은 가장 자유롭고 편안한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 자광 스님은 법문집 『깨침의 소리』에서 계를 지켜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계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파계(破戒)는 불행한 인생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한 번 마음 밖으로 달아난 나쁜 마음은 꼭 불행이란 친구를 데리고 돌아온다. 계를 지켜 생활습관을 잘 길들이지 않으면 운명이 고달프게 되고, 계를 지켜 생명을 잘 발전시키면 곧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 이러한 신념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바쁜 군승시절에도 틈을 내어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 계율학을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훗날 대한불교조계종 호계원장을 지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에 다니면서 인도철학의 베다 시대 시들을 재미있게 공부했다. 인도철학은 서경수 교수로부터, 불교학은 김동화 박사로부터 배웠다. 자칭 국보라고 하던 양주동 박사와 서정주 시인에게도 강의를 들었다. 동국대학교 교직원 불자회에서 청담·숭산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을 초대해 법문을 마련하곤 했는데, 빠지지 않고 스님들의 설법을 들은 것이 불교를 폭넓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졸업식
대학 생활 4년은 포교 방법을 배우려고 열심히 노력한 시기였다. 포교에 대한 열정을 한시도 잃은 적이 없었다. 포교를 잘하려면 정확하게 부처님의 교리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었다. 좋은 강의를 들으면 그것을 청소년들에게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노트에 꼼꼼히 메모해두었다. 노트의 권수가 늘어갈수록 머릿속에 불교의 요지가 정확하게 정리되었다. 불교에 대한 개론을 배우고 나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가 더 분명해졌다.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청정자성(淸淨自性)을 일깨워 인간의 참된 존재 가치를 알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욕이 용솟음쳤다. 공부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학교 근처에 있던 명성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법회를 시작했다. 기초교리와 찬불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임명장을 준 것도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너와 내가 하나 된 세계 속에서 공존하며 서로 돕고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가르쳤다. 마음이 세계를 만드니 그 ‘마음’을 깨달아야 참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모두 진지하게 들으며 착실하게 공부했다. 방학 때가 되면 학생들을 데리고 산사에서 수련회를 열어 예불이 얼마나 경건하고 아름다운지를 체험하게 했다. 108배를 함께 하고 참선을 가르치자 학생들의 내면이 고요해지고 생명력이 돋아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스님의 가르침에 눈을 틔워 졸업 후에 출가하는 학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졸업할 때쯤 지방을 순회하면서 설법을 하는 시간도 가졌다. 전국 순회 법회단을 만들어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에는 서울역에서 신의주까지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차 안에서 포교활동을 했다는 선배 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환희심이 절로 올라와 대중 포교에 온몸을 바치리라 다짐하곤 했다.
동국대학교 명진관 앞 팔정도에서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