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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대중생활

자광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 있던 2년 동안 은사스님에게 편지를 단 한 번 받았다. 차비가 없어서 서울 총무원에 주석하고 있는 은사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일은 꿈도 못 꾸고 있는 걸 아셨는지 어느 날 은사 경산 스님이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사고 없이 대중들과 잘 지내고, 명예에 실추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총무원장의 상좌로서 모범이 되라는 내용을 주로 하여 몇 장에 걸쳐 세세하게 상좌가 지녀야 할 몸가짐에 대해 적어 보낸 것이다. 해인사에서 사는 동안 은사스님의 당부를 그대로 실천하며 승려생활에 필요한 대중생활을 익혔다. 스님은 해인사에 내려가자마자 채공(菜供)으로 투입되었다. 사중 살림이 어려워 공양주를 따로 둘 수 없던 때였다. 사미승들이 공양주를 하고 국을 끓이는 갱두(羹頭), 반찬을 만드는 채공, 땔감을 해오는 부목(負木) 소임을 보았다. 원주와 별좌스님이 시장을 봐오면 200여 스님들의 반찬을 준비했다. 그때 익힌 솜씨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스님은 지금도 음식 솜씨가 좋다. 채공 소임을 보면서 밭에 씨를 뿌리고 채소를 심었다. 감자도 심어 먹고 김장도 했다. 그래도 해인사는 다른 절보다 형편이 좀 나았다. 쌀과 보리를 2대 1의 비율로 넣어 밥을 지었다. 꽁보리밥보다 나았지만 젊어서 그랬는지 늘 배고팠다. 가끔 공양주가 학인들에게 내놓는 누룽지는 최고의 인기 간식이었다. 잣나무를 털어서 잣을 수확해 팔기도 하고 감도 깎아서 말려 곶감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래도 항상 식량이 부족했다. 밥을 부족하게 먹으니 대신 짜지 않고 맛있는 김치를 반포기 혹은 한 포기씩을 먹기도 했다. 김장 김치가 떨어질 지경에 이르자 주지인 청담 스님이 중간에 장독을 열고 다 익은 김치에 소금을 한 가마 정도 뿌렸다. 소금을 듬뿍 뿌려놓으면 짜서 많이 못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맛있는 김장김치가 ‘염조(鹽祖)’가 된 것이다. 절에서 김치를 ‘염조(소금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연유를 학인들 모두 체험하게 되었고, 풍족할 리 없는 김치까지도 아껴가며 한겨울을 버텼다. 절약하며 그렇게 견딘 시간들이 해인사의 역사를 만들었던 것이다. 연필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을 써보지 못할 만큼 생활이 어려웠었다. 몽당연필을 깎아서 침을 발라서 꾹꾹 눌러 글씨를 쓰곤 했다. 누군가 만년필을 가지고 있으면 신기해서 촌사람 서울 구경 가듯 구경을 갔을 정도다. 청담 스님이 주지를 그만두고 영암 스님이 주지를 할 때, 경내에 축구장이 만들어졌다. 오후 2시가 되면 모든 학인들이 나와서 의무적으로 축구를 했다. 변변한 축구공이 없어서 새끼줄로 공을 만들어 찼다. 축구공이 시주물로 들어와 그것을 가지고 축구를 했던 기억도 있다. 저녁이 되면 밤새도록 산을 지키기도 했다. 벌목꾼들이 들어와서 나무를 베어 팔았기 때문이다. 트럭을 대어놓고 나무를 베어가기도 했다. 학인스님들 너덧 명씩 짝을 지어 가야산 곳곳을 지켰다. 목숨을 잃은 스님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산을 지키는 사람을 산감(山監)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가야산의 울창한 숲은 학인스님들에 의해서 지켜진 것이다. 전국의 다른 사찰들도 마찬가지였다. 목숨을 걸고 지킨 공덕으로 오늘날 사찰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보존되고 있다. 그 후 사찰 경제가 조금 나아지자 전문 산감을 두게 되었다. 상급반 학인은 간평(看坪)을 하러 나가기도 했다. 간평이란 소작지에서 농작물을 수확하기 전에 지주나 지주의 대리인이 미리 작황을 조사해 소작료를 결정하는 일을 말한다. 당시 해인사는 근방에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었고, 스님들이 그 일을 맡아서 했다. 그렇게 가야산을 지키고 도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조화롭게 사는 대중생활을 익히고 포교를 하는 데 필요한 이론을 공부했다.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하든 싫어하는 일 없이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사신다. 젊은 날 강원에서의 생활도 역시 좋았다. 6년 동안 경전을 다 배워서 대 논사가 된 다음 선방으로 가서 참선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럴 즈음 종단에서 장학금을 주어 대학 공부를 시킨다는 소식이 들렸다. 동국대학교에 들어갈 생각이 있는 사람은 응시하라고 했다. 학비가 없어서 교재도 선배에게 물려받아 쓰는 상황에서 종단에서 주는 학비로 대학을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현대적인 포교에 대한 열망이 크던 상황에서 현대교육을 받을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정보는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논사가 되고 선방으로 가자던 생각을 접고 대학 진학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은사스님께서도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진학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보내왔다. 작은 나무 몇 그루가 세월이 흐르면 거목이 되고 그 나무들이 푸르고 큰 숲을 이루듯 사람을 키워야 종단이 살고 종단이 살아야 포교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은사스님의 생각이었다. 경산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한 상좌들을 불러 종비생으로 동국대학교에 들어가도록 권했다. 포교를 하려면 불교는 물론 사회학이나 철학, 현대 과학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지식이 필요하니 많은 것을 배워 놓았다가 포교할 때 쓰라고 격려했다. 다방면으로 익힌 지식을 불교에 접목해서 대중들이 불교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포교를 해야 한다는 열망이 떠나지 않고 있던 자광 스님은 은사스님의 의견에 적극 동의하며 대학 입시준비를 서둘렀다.
20대 초반 해인사에서 대중생활을 하면서 검소한 생활과 인욕을 배우고, 무엇보다 노스님들의 티 한 점 없이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 모습과 굳건한 신심, 부처님을 향한 절대적 존경심을 보면서 수행자로 살면서 그것을 놓치면 부처님 제자로서의 자존심을 잃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해인사는 평생의 원력인 대중 교화를 실천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신심을 배우고 굳건히 세운 곳이었어요.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대담에서(2022.5.10.)
1900년대 중반 해인사 풍경 (출처 : 해인사)
· 집필자 : 박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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