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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에 대한 원력을 세우다

대종사 자광 큰스님의 특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베푸는 자비로움과 일평생 멈추지 않은 포교활동에 있다.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천이 곧 포교다. 그런 의미에서 자비와 포교는 둘이 아닌 셈이다. 언제 어디서나 배어 나오는 조용한 미소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부드러운 음성은 스님이 자비로움과 하나 된 수행자임을 느끼게 한다. 그 자비로움은 수많은 대중을 향해 펼쳤던 60여 년간의 포교활동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포교에 대한 원력은 스무 살에 수계하고 스승으로부터 ‘자광(慈光)’이라는 법명을 받은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스님은 1960년 음력 2월 28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경산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은사로부터 승려가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태도를 배우고, 여러 어른 스님들을 보면서 수행자란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수행력과 겸손을 함께 갖춘 존재라는 것을 익히고 난 뒤였다. 수계를 했다는 것은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경산 스님의 동국대학교 이사장 취임 직후 남산 팔각정에서 (자광 스님, 경산 큰스님, 조재호 씨)
은사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자광’이었다. 경산 스님은 제자들에게 ‘자(慈)’자 돌림의 법명을 주었다. ‘승려의 삶에서 중생을 위한 자비 실현 말고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어떤 경우에도 자비를 품고 중생을 포용하며 살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무릇 자비로부터 빛이 나온다. 빛은 자성이며 본질이다. 그러므로 자비가 나올 때 본래 생명의 자리로 돌아가며, 그 자리에서 인간은 완성된다. 스님은 출가 이후 한평생 자비심을 화두처럼 가슴에 품고 포교를 실천했다. 다음은 자광 스님이 어느 법회에서 신도들에게 설한 자비에 대한 법문이다. 자비심으로 이웃과 동체대비가 되었던 스님의 한평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불교를 바로 믿는 것입니다. 마음을 닦는 수행도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수행이 무르익어 자비심과 하나가 되어서 내 손길이 닿는 곳마다 따뜻한 자비가 넘쳐나고 나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을 때, 이 자비는 인연의 법칙 속에서 동체대비인 모든 이웃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불문에 들어와 공부해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은 생각보다 위대한 분이었다. 그 어떤 집착도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안 수행자였다.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부처님은 자비로운 분이었다. 스물아홉에 출가해서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을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길 위에서 살았다.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염원하며 일평생을 살았으니 자비심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광 스님도 부처님처럼 오로지 중생교화를 위해 살고 싶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사람은 행위에 의해 존재하니 부처님처럼 중생을 향해 자비를 행하면 부처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알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환희심이 올라왔다. 수계를 하면서 스님은 부처님처럼 자비로움을 실천하며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원력을 굳건히 했다. 초심 시절에 포교에 대한 원력을 세우고 스님이 차근차근 이룬 포교 업적은 조계종사에 길이 빛날 만한 것이었다. 군승법사 3기로 임관해 25년 동안 군법사로 있으면서 초창기부터 한국 군 포교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수많은 군인들을 불교에 입문시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고, 전역 후에는 군종특별교구장으로 재직하면서 논산 훈련소 호국연무사 불사를 완성했다. 호국연무사의 불사는 한국 현대불교사에 길이 남을 불사로 연간 10만 명의 장병들이 수계를 하고 불자로 거듭나는 데 발판이 되고 있다. 종립학교인 동국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종립학교 발전에 이룬 업적도 괄목할만하다. 화합을 기반으로 한 탁월한 리더십으로 대학의 안정과 정체성을 확립시켰고, 국내 대학 처음으로 총장 후보자 공개토론회를 도입해서 총장선거를 평화적으로 치러냈다. 교내 환경 근로자(미화원) 전원의 직고용은 학교 운영의 큰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자광 스님이 평생 심혈을 기울인 대중 포교를 처음 시작한 것은, 수계를 하고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건봉사에 내려가 교무소임을 보면서 고성고등학교를 마치고 조계사로 올라온 후부터다. 현대인들을 제도하려면 제도권에서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니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놓는 것이 좋겠다는 은사스님의 말씀에 따라 늦게나마 학업을 마친 것이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다. 종비생으로 동국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군법사로 포교를 한 것도 고교졸업장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은사인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선출되자 총무원장 시자로 다시 서울로 올라와 조계사에서 은사스님을 시봉하면서 본격적으로 포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행자시절 때부터 조계사에 오는 신도들을 보면서 생각했었다. 대개 나이 든 분들이 절에 오는 걸 보면서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에게 불법을 전할 수 있을까 하고 포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젊은 날 품었던 그러한 물음이 평생의 화두가 되어 포교의 길을 걷게 했다.
동국대학교 재학 중 명성여고 법사를 맡았다.
마침 조계사에서 어린이법회를 열고 있던 운문(雲門, 1928-2018) 스님이 법회를 같이 하자고 권유했다. 운문 스님은 우리나라 어린이 포교의 시조로 참선공부를 하다가 포교 없이는 한국 불교의 미래가 없음을 알고 포교 일선에 뛰어든 수행자다. 1950년대부터 찬불가 보급에 앞장섰던 운문 스님은 포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젊은 자광 스님에게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린이 포교에 있다면서 아직 기복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에게 30년 동안만 바른 법을 가르치면 한국불교가 바른 길로 가게 될 거라며 함께 일을 해보자고 간곡하게 권했다. 정화불사에 전념하는 스님들을 보면서 정화불사가 끝나면 포교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 오던 터라 운문 스님의 권고가 마음속 깊이 들어왔다. 운문 스님을 도와 어린이 법회와 청소년 법회를 함께 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을 부처님처럼 귀하게 대하고 불교를 가르쳐야 한국불교의 미래가 밝다는 운문 스님의 신념에 감동하면서 마음이 온통 어린이 법회에 머물기 시작했다. 은사스님의 시봉은 뒷전이 되었다. 총무원장실에 들어오는 과일이며 간식을 보관해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조계사에는 어린이회, 중고등학생회, 청년회, 일반신도회 법회가 있었다. 불교에 대한 청년들의 애정과 신심이 깊었다. 법당에 가면 큰스님들을 초청한 법회가 수시로 열리고 있었다. 자광 스님은 『초발심자경문』에서 배운 감동 깊었던 내용과 고승들에게서 들은 법문을 메모해 두었다가 청소년법회 때 활용했다. 이후 해인강원과 동국대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도 늘 ‘어떻게 하면 이렇게 훌륭한 교리를 아이들에게 잘 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당시 현장에서의 포교 경험이 강원과 대학에서 이론을 배울 때 불교의 핵심을 짚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들이 하나둘 부처님의 가르침에 눈 떠가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포교에 대한 원력이 더 깊어졌다. 학생들에게 진심을 다해 공을 들인 결과는 고스란히 나타났다. 그때의 그들이 성장해서 한때 전국신도회 사무총장 등을 맡으면서 왕성하게 활동했고, 역사가 깊은 조계사 청년회 회원들은 그 후 학계, 법조계 등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서 활동을 이어갔다. 조계사에서 은사스님을 시봉하며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힘을 기울이면서 보낸 3년여의 세월은 훗날 25년 군 포교를 하는 데도 단단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건봉사 시절의 포교 활동
· 집필자 : 박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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