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에서의 스승은 제자의 일생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광 스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장 어려울 때 불교를 만났고, 불가에 들어와서도 가장 중요한 때 운명처럼 은사 스님을 만나 스승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은사인 학월 경산(鶴月京山, 1917-1979) 스님은 함경남도 풍산군 안산면 황수원 출신으로 스무 살 때 금강산 유점사로 입산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나라를 빼앗긴 환경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로 고뇌하다가 불교에서 그 출구를 발견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유점사 불교전문 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하고 금강산 마하연사에서 정진하다가 해방 이후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내로라하던 선지식인 만공·한암·경봉·동산·효봉 선사 등을 제방 선원에서 모시고 정진한 수행자다.
오로지 수좌의 길을 걸으며 정진만 하다가 1954년, 비구 종단의 정화가 시작되자 서울로 올라왔다. 시대가 한평생 수좌로 살기만을 꿈꾸었던 수행승을 정화불사의 현장으로 불러낸 것이다. 예순셋으로 입적할 때까지 대한불교조계종 정화불사의 기수로 불리면서 종단과 교단의 발전에 온몸을 던졌다. 한국 불교 발전의 원동력이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것에 있다는 신념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던 수행자다. 총무원장 소임을 보면서 실무자들에게 계율을 잘 지키는 것이 정화운동이고, 수행자의 본분이며 성불의 길이라고 역설할 만큼 계율의 중요함을 강조했던 분이다. 계율 수호와 종단 화합, 사부대중의 화합을 평생 화두로 삼으면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수행자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대와 9대 총무원장과 동국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할 만큼 교계 안팎의 신망이 두터웠다. 총무원장 재임 시에는 종단의 발전과 포교 확장을 위한 종비생제도와 군승제도를 확립시켰다.
은사이신 학월 경산 큰스님
자광 스님은 은사스님의 첫인상을 잊을 수 없다. 경산 스님의 방문 앞에 서서 진여 스님이 화엄사에서 스님을 모실 시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고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북한 사투리가 흘러나왔다. 진여 스님을 따라 들어가서 인사를 드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은사스님은 거룩한 성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얼굴에서는 빛이 났으며 몸가짐은 범접할 수 없는 위의로 가득 차 있었다. 책을 보며 상상해 왔던 부처님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경산 스님은 화엄사에서 올라온 작은 몸집에 순진한 얼굴을 한 행자를 바라보곤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는 표시였다. 그날부터 제자는 스승이 입적하는 날까지 은사스님을 부모님처럼 모셨고, 은사스님은 부모가 자식을 키우듯 제자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바르게 살며 자비로 중생을 포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솔선수범해 가르쳤다. 시봉할 사람으로 합격점을 받은 날, 스승을 받들어 모신다는 시봉이 무엇인지 몰랐던 열아홉 살의 제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님, 앞으로 제가 무얼 해드려야 되나요?”
마흔세 살의 스승이 무심히 대답했다.
“알아서 하라우.”
그날부터 스승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알아서 했다. 스승이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을 개고 세숫물을 준비해 드렸다. 아침공양 상을 차리고 벗어놓은 양말을 세탁해서 정리해 놓았다. 점심에 손님들이 오면 물과 다과를 내갔고, 저녁에는 주무실 자리를 깔아드렸다. 그렇게 조계사에서 행자생활이 시작되었다. 은사스님과의 첫 만남에 대한 스님의 회고이다.
은사 스님은 아무리 바쁘셔도 늘 새벽에 일어나시면 율서를 보고 계셨어요. 좋아하셨던 냉면에 육수 한 방울만 들어가도 밀어내셨던 분입니다. 적대감을 가진 사람이 와서 거친 말을 쏟아내도 다 받아내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띤 채 자비로운 모습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화합의 명수’라는 말을 들으시기도 했지요. 돌아보면, 그 힘든 정화불사를 헤쳐 나갔던 은사스님의 발걸음을 나 또한 그림자처럼 밟으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대담에서(2022.5.10.)
자광 스님의 회고처럼 스님의 일생은 스승의 삶과 많이 닮아 있다. 겸손하고 온유한 언행이며, 종단에 화합이 필요할 때마다 보직을 맡아 문제를 풀어내고 공심으로 종단의 일을 하면서 한평생 율사의 길만을 걸어왔던 스승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은사스님에게서만 수행자의 삶을 배운 것이 아니다. 자광 스님이 출가한 1960년대 전후의 종단은 정화불사가 한창이어서 몹시 혼란한 분위기 속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대부분의 중요한 절들은 대처승들이 가지고 있어 그들을 몰아내고 본사 급의 주요 절은 비구가 차지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대립이 벌어졌고 피치 못할 폭력도 있었다.
경산 스님의 종단 운영 방침. ‘지계와 자율은 승가의 생명’
동산(東山, 1890-1965)·경봉(鏡峰, 1892-1982)·청담(靑潭, 1902-1971)·월산(月山, 1912-1997) 스님 등 훗날 고승이 된 분들이 총무원으로 올라와 종단 회의에 참석했다. 정화불사라는 심각하고 중차대한 난제를 앞에 두고 있었으나 풀어가는 방법은 유연했다. 회의장은 화기애애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책상을 치며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웃는 얼굴에 장난기 섞인 농담도 오고 갔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난제들을 의논하고 대책을 세우며 귀한 의견들을 도출해 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면서 수행자의 지혜와 자비, 위의를 배웠던 스님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당시 노스님들은 60대이셨고, 경산 스님은 40대 초반이었어요. 그런데 그 인품과 도력의 성숙도는 지금 사람들과 비교가 안 돼요. 한 종단과 국가를 넘어서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분들이었어요. 정신세계를 이끌어가는 수행자이었기에 완벽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대담에서(2022.5.10.)
은사를 시봉하면서 보았던 고승들의 인품과 수행력, 그리고 세상을 대하던 태도가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 듯 삶 속으로 스며들어 스님의 것이 되었다.
경산스님의 노력으로 마침내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되었다. (출처 : 《법보신문》)
· 집필자 : 박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