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초발심 시절

지리산 화엄사에 도착하니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오라던 스님은 다른 데로 가고 없었다. 주지스님을 만나 출가하러 왔다고 하자 별다른 말없이 행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날부터 예비수행자인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시 화엄사에 있던 행자는 다섯 명, 대중 스님은 열 분 가량 있었다. 전생에 화엄사에 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첫날부터 각황전 법당에서 예불을 올리는데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각황전에 있는 부처님이 자신을 이끌어줄 스승으로 다가왔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존재로 여겨졌다. 매일매일 법당에 들어가 절하며 예불을 드렸다. 화엄사는 화엄종의 시조인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한 역사가 오래된 절이다. 백제 법왕 때는 3천 명의 스님들이 주석하면서 화엄사상을 백제 땅에 꽃 피웠다고 한다. 신라 시대 자장 율사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시고 4사자 3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규모가 꽤 큰 절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은 화엄사는 황폐해져 있었다. 무너진 곳이 많아도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인부를 사서 수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엄사의 곳간은 텅 비어있었고 땔감도 없었다.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쌀은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해서 마련했고, 산과 들로 나가서 나물을 뜯어 반찬을 만들었다. 땔감은 산에 올라가 잘려나간 가지들을 주워 와서 마련했다. 옷은 누가 입다가 버리고 간 것을 빨아서 입었다. 땔감이 부족해서 방에 넉넉히 불을 넣지 못했다. 잠을 잘 때도 추워서 웅크리고 누워 잤다. 노스님들에게 아랫목을 내어주고 차디찬 윗목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피가 반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래도 새벽 3시면 일어나 예불에 참석했다. 밥을 준비하는 공양주와 국을 끓이는 갱두 노릇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각황전에서 예불을 올리고 기도를 했다. 새벽예불을 올릴 때 느낀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룻바닥의 감촉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불기운 하나 없는 큰 법당에서 숯 물을 들인 광목천으로 만든 얇은 옷을 입고 서 있자면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겉옷도 남들이 버리고 간 옷을 주워 입었으니 내의는 바랄 수도 없었다.
화엄사 각황전 (출처 : 지리산 화엄사)
절집도, 세간도 다 가난했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요구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러한 가난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언제고 부처님처럼 깨달아 완성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가끔 자광 스님에게 ‘어린 나이에 어디서 그런 신심이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묻는데, 그럴 때마다 대답하곤 한다.
전쟁을 겪고 부모와 형제를 잃어본 사람들은 당시의 10대가 얼마나 어른스러웠는지 압니다. 신문팔이를 하고 막노동도 해서 가정을 이끄는 10대들이 허다했어요. 중학교만 들어가도 어른 노릇을 했기 때문에 열여덟의 나이는 이미 어른이었어요.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겁니다.
신심이 깊었던 한쪽에는 부처님의 보호 아래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안전하다는 생각도 함께 있었다. 절에서 나가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춥고 배고픈 것은 여전했지만 세속에서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일이 고되고 힘들어도 따뜻하고 안전한 느낌이었다.
사미승 시절의 자광 스님
정기적으로 열리는 법회는 없었으나 주석하고 있는 스님들이 아침저녁으로 예불하고 사시마지를 올렸다. 지금처럼 체계 있게 갖추어진 생활 속에서 행자생활을 하지 못했다. 의식(儀式)을 익히고 행자들의 필독서인 『초발심자경문』을 배울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화엄사에는 비구와 대처승들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예불의식의 기본서인 『천수경』을 외웠다. 선배 행자가 부지깽이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춰 외우는 것을 보면서 따라 했다. 그렇게 세간에서 익혔던 습관을 바꾸며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시간들을 보냈다.
모든 게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졌던 화엄사에서 부목, 산감, 채공, 공양주까지 안 해본 것 없이 골고루 다 했다. 일하느라 바빠서 재미있는 추억거리 하나 만들 새 없이 밤이면 곯아떨어지곤 했다. 그래도 고달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나의 궁극적 발전을 위한 과정이라고 여긴 행자시절이었다. -「나의 행자 시절」, 『해인』(2016.11.)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익숙하게 외우고 예불문과 불공시식을 익히면서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새로 부임한 주지스님이 불렀다. 서울 총무원에서 총무국장을 맡고 있으면서 화엄사 주지를 겸하고 있던 최진여 스님이었다. 대처승이던 주지스님이 물러나고 비구 스님이 주지로 온 것이었다. 서울과 화엄사를 오가며 일을 보던 활동적인 스님이라는 것만 알 뿐 거의 말을 나누어 본 적이 없던 주지스님이 서울로 올라가자고 했다. 서울로 간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유를 물으니, 총무원의 교무부장인 경산 스님을 모실 시자가 필요한데, 그동안의 성실한 행동거지를 눈여겨보고 있다가 적임자로 여기고 스님을 추천한 것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많은 스님들이 경산 스님을 모실 시자를 알아보고 있었다고 했다. 총무원이 어떤 곳이며, 교무부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 경산 스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으나 행자 신분으로 주지스님의 명을 마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여 스님은 나중에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을 할 때 총무국장 소임을 보았다. 종단의 발전에 대한 원력이 깊고 실력이 있던 분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주지스님은 급한 볼 일이 있다며 먼저 서울로 올라갔다. 며칠 후 옷가지를 넣은 가방을 들고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총무원이 있는 조계사로 가기 위해 구례에서 기차를 탔다. 서울은 태어나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진여 스님이 시킨 대로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조계사까지 와서 내렸는데 신발이 없었다. 택시 안을 들여다봐도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역에서 택시를 탈 때 택시 안이 너무 깨끗해 보여서 신발을 벗고 탄 것이었다. 서울도 초행길인 데다 택시도 태어나 처음 타봤으니 신발을 벗고 타는 줄 알았다.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조계사의 원주스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택시비를 내주고 맨발로 서 있는 행자를 바라보고 씩 웃더니 신발 한 켤레를 사주었다. 서울역에 벗어둔 신발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깝다. 서울로 간다고 하자 화엄사 노스님들이 사준 새 신발이었다. 그러한 해프닝을 치르고 드디어 은사 스님을 만났다. 출가 이후 부모님과 같은 역할을 해준 분이었고, 삶의 굽이굽이 중요한 순간마다 운명을 바꿔준 스승이었다.
서울 조계사 (출처 : 조계사)
· 집필자 : 박원자

관련자료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