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화의 주역인 동산 혜일(東山慧日, 1890-1965) 스님은 용성 진종 조사의 제자이다. 동산 스님은 용성 조사가 건백서에 쓴 불교정화 이념을 그대로 구현했다. 동산 스님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 중 한 분인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조카이다. 용성 조사와 동산 스님의 법연을 잇게 해준 이가 바로 오세창이다. 천도교 신자인 오세창은 왜 용성 조사에게 누나의 아들을 소개시켜준 것도 모자라서 출가자로 만든 것일까? 조카가 출가 전에 천도교의 교리를 비판하니 오세창은 하는 수 없이 반연(絆緣)이 깊은 용성 조사에게 보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불심 도문 법사도 동산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은 것이다. 도문 법사는 1956년 22세에 만암 종헌(曼庵宗憲)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4년 뒤 다시 동산 스님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도문 법사와 동산 스님의 법연(法緣)은 1954년 대각사에서 무자(無字) 화두를 받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산 스님은 납승들에게 대부분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 화두를 내렸는데, 도문 법사에게는 이례적으로 무자 화두를 내렸다. 그 이유는 도문 법사가 만암 스님으로부터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받고 타파하여 전세의 습을 인가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동산 스님은 도문 법사에게 ‘있다’거나 ‘없다’라고 분별하는 무자 화두가 아니라 순전한 무(無)의 화두를 내렸다. 이 순전한 무의 화두는 보림(保任)의 경계를 유지하는 분별심의 유무를 초월한 화두였다.
용성 조사는 출옥 후 1921년 한 화공을 불러서 당신의 진영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그 진영에 자찬(自撰)을 남겼는데, 글에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는 것은 조주(趙州) 선사의 망령된 분별’이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동산 스님이 도문 법사에게 내린 무자 화두는 용성 조사의 자찬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1961년 은사인 동헌 완규 조사가 범어사 주지로 주석하자 도문 법사도 범어사에서 수행하였다. 당시 도문 법사는 홍(紅) 가사를 수하고 예불을 드리는데 한 스님이 도문 법사가 수하고 있는 홍 가사를 찢었다. 대처승의 가사라는 이유에서였다. 하루는 동헌 조사가 도문 법사를 부르더니 “동산 스님은 네게 무자화두를 주셨으니 네게는 스승과 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였다. 당시 만암 스님을 따르는 스님들이 대부분 대처승이어서 도문 법사는 다시 동산 스님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동헌 조사는 입적을 앞두고 도문 법사에게 말씀했다.
“용성 조사께서 동산 스님은 해방 이후 조선 불교계를 이끌어나갈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용성 조사는 동산 스님에게도,
“너는 앞으로 나라가 해방되면 불교계를 이끌어나갈 계획을 세우라.”
고 당부했던 것이다. 도문 법사는 용성 조사의 문하에서 율맥을 받은 45명의 수행자 중 가장 빼어난 수행자로 동산 스님을 꼽고 있다. 그 이유는 동산 스님이 용성 조사의 건백서에 담긴 정신을 잘 구현했기 때문이다.
도문 법사는 용성 조사의 건백서의 요체를 대각심(大覺心)으로 정의했다.
대각심인(大覺心印)을 허공에 찍어도 형상을 볼 수 없고, 물 위에 찍어도 흔적이 없고 비단과 종이에 찍어야만 역력히 나타난다. 참선, 염불, 간경, 주력, 불사 등 불교 5대 수행을 후대에 계승하는 것이 바로 대각심인이다. 대각심은 석가모니의 정법안장이다. 용성 조사의 정법안장을 계승한 분이 바로 동헌 조사와 동산 스님이다. 동헌 조사가 용성 조사의 유훈을 실현해왔다면 동산 스님은 용성 조사가 목숨처럼 여겼던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정신을 한국불교에 구현하였다. 동산 스님은 이미 일제 말기부터 한국불교를 정화하겠다는 의지를 가다듬고 준비해왔다. 동산 스님은 용성 조사의 대각사상으로 지적 미혹을 벗어버린 선지식이다.
용성 조사는 62세에 만일참선 결사회를 창설했다. 용성 조사는 도봉산 망월사로 가서 제대로 된 수행공동체의 규범을 공표했다. 그 내용인즉슨, 만일참선 결사회는 활구의 참선으로 견성성불하여 광도중생함을 목적으로 하고, 오후불식을 단행하고, 평시에는 묵언하며, 수행자들은 일체 동구출입을 금한다는 것이다. 만일참선 결사회에 참방하려면 『범망경』 4분율을 철저히 준수하기로 결심한 자, 범행이 청정한 자여야 했다. 호적상의 처자가 있는 자나 처자가 왕래하는 자는 선방에 들 수 없었다. 아픈 사람 말고는 반드시 불공과 의식에 참석해야 했고, 재가자들도 술, 고기, 오신채는 도량 안으로 가져올 수 없었다.
용성 조사의 발원대로 만일참선 결사에는 50여 명의 납자들이 모였다. 안타깝게도 도봉산 산림이 보안림으로 편입되어 일체 벌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땔감 없이 산사에서 수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만일참선 결사는 1기도 마치기 전에 통도사 내원암으로 수행처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통도사 내원암에서도 운영비가 부족한 데다가 수좌들의 수행태도가 방만해져서 청정한 수행공동체는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용성 조사가 만일참선 결사를 창설하면서 정한 규칙은 22년 뒤인 1947년 봉암사의 공주규약(共住規約)으로 계승되었다. 이와 관련 혜총 스님은 은사인 자운(慈雲) 스님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봉암사 결사는 망월사 결사를 이어받은 것이다. 처음 납자들이 결사를 계획하면서 우리도 망월사 결사처럼 해보자고 했다고 한다.”
고 주장했다. 봉암사 결사를 이끈 성철 스님은 용성 조사의 손상좌이고, 자운 스님은 용성 조사의 수법제자였다.
특히, 해인사 백련암은 용성 조사의 뒤를 이어서 상좌 동산 스님과 손상좌 성철 스님이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린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처이다. 3대로 이어진 사자후(獅子吼)의 포효가 한국불교를 깨웠던 것이다. 용성 조사가 동산 스님에게 해동 율맥을 전하는 현장에 성철 스님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성철 스님은 용성 조사를 직접 시봉하기도 했다. 용성 조사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면서 수행에 매진하는 성철 스님을 아꼈던 까닭에 공석이든 사석이든 ‘성철 수좌’라고 불렀다. 계율을 목숨처럼 여기는 용성 조사가 계셨기에 한국불교의 청정수행 가풍이 바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도문 법사가 계율을 목숨처럼 여기고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을 실현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수행에 매진한 까닭은 용성 조사의 만일참선 결사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