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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조사에게서 받은 해동 율맥의 가풍

용성 진종 조사는 1884년 세납 21세에 영취산 통도사에서 선곡(禪谷) 율사로부터 전법을 받고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해동 율맥을 계승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율맥은 자장 율사 이래로 면면이 계승돼 왔다. 자장 율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가사와 부처님 사리를 받아서 고국인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통도사에서 금강계단을 마련했는데, 이 금강계단은 문수보살이 내려준 도식(圖式)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선덕여왕이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았다. 이후 해동 율맥은 조선시대까지 계승돼 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환성 지안 스님이 순교함에 따라 해동 율맥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금담(金潭, 1765-1848) 스님이 제자 대은(大隱, 1780-1841) 스님과 서상(瑞祥) 수계 서원을 세웠다. 1826년 7월 1일부터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밤낮으로 계를 내려달라고 기도를 올렸고, 7일이 지나자 허공에서 상서로운 빛이 내려왔다. 그런데 그 빛은 스승인 금담 스님이 아닌 제자인 대은 스님의 정수리에 내렸던 것이다. 또한 저절로 향에 불이 붙어서 사위(四圍)가 향기로웠다. 금담 스님은 16세 어린 제자 대은 스님에게 오체투지의 절을 올렸다. 대은 스님이 해동 율맥 초조가 되었고, 금담 스님이 그 뒤를 이어서 2조가 되었다.
『각설범망경』
용성 조사는 『각설범망경(覺說梵網經)』을 통해 파계를 일삼는 승려를 꾸짖었다.
이제 야생 여우와 정령의 무리가 옛 가르침을 마음대로 꿰어맞춰서 옛 성인을 모방해서,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성내고 살생하며, 간음하면서 ‘반야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혹은 ‘진묵(震默)은 술을 마셨고, 보지공(寶誌公)은 비둘기를 먹었고, 무염족왕(無厭足王)은 살생을 행하고, 바수밀녀(婆須密女)는 간음을 행하였다.’라고 말하며 자기를 옛날 성인에 감히 견주어서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간음하고 분노하며 어리석은 행동들을 거침없이 행하되 조금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 혹 계율을 지녀서 수행하는 사람을 보면 ‘상(相)에 집착하는 소기(小機)’라고 비방하며 심한 경우는 계를 지니며 수행하는 사람을 원수와 같이 질시하는 자도 넘치듯이 많다.
계율을 목숨처럼 여겼던 용성 조사이기에 해인사, 범어사, 함북 회령 대흥사 등에 금강계단을 개설하고 제자들에게 계를 내렸던 것이다. 용성 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승려가 처를 두고 고기를 먹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1925년 승려의 대처식육 허용 여부가 불교계 최대의 관심사였다. 총독부가 승려의 대처식육을 허용하려고 하자 용성 조사는 비구 172명의 동의를 받아 건백서(建白書)를 작성한 뒤 총독부에 보냈다.
세존께서는 가르침을 믿는 사람을 사부대중으로 나누셨는데 그중에 출가한 비구와 비구니 이부대중(二部大衆)은 불법 가운데 하나로 구분된 종파를 성립함으로써 대처식육을 엄금하여 오로지 도업(道業)에만 부지런히 힘을 써서 제불의 교법을 맡아서 처리하게 하시고 천하의 후세에 전수함으로써 등불이 상속되게 하셨고, 게다가 무상한 세상이 갖가지로 허망한 환상이 되니 즐거워할 것이 없음을 간파하고 다만 견성성불을 근본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중략)… 이미 출가한 불자라고 하면 불조의 계율을 준수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서 비구의 『사분율(四分律)』에서 경계하는 것이 지엄하다는 것을 천하의 대중들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건백서」
하지만 총독부는 용성 조사가 보낸 건백서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용성 조사는 2차 건백서를 총독부에 보냈다. 용성 조사가 지극한 마음으로 건의한 내용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총독부는 승려의 결혼을 유도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러다 보니 해방 후에도 통합종단 출범까지 비구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서 용성 조사의 주장을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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