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도문 법사는 중도 사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하고 있다.
중도사상을 바로 이해하려면 4성제와 8정도를 알아야 한다.
4성제(四聖諦)는 부처님께서 본 4가지 진리로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일컫는다. 고성제는 인생이 고통의 연속임을 아는 것이다. 인생에는 4고[四苦]와 8고[八苦]가 있다. 4고는 생로병사이다. 생고(生苦)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출생할 때까지 받는 고통이다. 노고(老苦)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받는 고통이다. 병고(病苦)는 병에 들었을 때 받는 몸과 마음의 고통이다. 사고(死苦)는 목숨을 마칠 때의 고통이다. 사고에는 수재, 화재 등 사고로 인해 자신의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을 때의 고통도 포함된다.
8고는 4고에 인생을 살면서 갖게 되는 4가지 심리적 고통을 더한 것이다.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고통이다.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원수 내지는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 상대와 만나는 고통이다. 구부득고(求不得苦)는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다.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음이 너무 치성해서 생긴 고통이다.
집성제(集聖諦)는 고통의 원인이 번뇌에서 비롯됨을 아는 것이다. 번뇌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여섯 가지는 탐애(貪愛), 진에(瞋恚), 우치(愚擬), 교만(憍慢), 의혹(疑惑), 악견(惡見)이다. 멸성제(滅聖諦)는 고통을 여의고 열반에 드는 길을 아는 것이다. 도성제(道聖諦)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8정도(八正道)를 이해하는 것이다.
8정도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정견은 편견을 여읜 바른 견해이다. 정사유는 정견에 따라서 바르게 사유하는 것이다. 정어는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 정업은 몸과 입과 생각을 청정하게 하여 일체의 사념 망상을 여의는 것이다. 정명은 행동, 말, 생각으로 악업(惡業)을 짓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정정진은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정념은 분별을 버리고 항상 수행하는 데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정정은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8정도의 출발은 정견이다. 8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8정도는 중생을 미혹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으로 인도하는 수행법이어서 나룻배[船]나 뗏목[筏]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8정도 말고도 육바라밀 수행을 강조하게 되었다. 육바라밀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이다. 보시는 자비심으로써 다른 이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일컫는다. 희사(喜捨), 수혜(授惠)라고도 한다. 돈이나 물품을 주는 것뿐만 아니고, 친절한 행동도 보시이다. 3종 보시는 재물(財物), 법(法), 무외(無畏) 보시이다. 재물보시는 돈이나 재물인 물질로 보시하는 것이다. 법보시는 다른 이에게 교법을 설하여 선근을 자라게 하고 불법을 설하여 대중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부처님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간행해 유포하는 것도 법보시이다. 무외보시는 계(戒)를 지니어 남을 침해하지 아니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
지계는 악(惡)을 그치고 선(善)을 닦아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 인욕은 치욕을 받고도 상대에 대한 원망 없이 참는 것이다. 정진은 용맹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선정은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한 경지에 들어 선악(善惡), 시비(是非), 유무(有無)라는 차별적인 사고를 넘어서 안락하고 자재한 경계에 드는 것이다. 지혜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태어나서 죽는 이 생사의 언덕을 건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중도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종합한 견해이다. 단견은 만유(萬有)는 무상한 것이어서 인연의 가합상(假合相)일 뿐 실재하지 않으므로 사람도 죽으면 몸과 마음이 모두 사라진다는 견해이다. 그런가 하면 상견은 사람은 죽으나 자아는 없어지지 않으며 오온(五蘊)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常住不變)한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그릇된 두 극단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 중도이다. 중도는 정립(定立)과 반정립(反定立)이라는 두 극단의 양변을 여읨으로써 새로운 견해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는 유(有)에도 치우치지 않고 무(無)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괴로움의 근원적인 원인은 번뇌인데, 108번뇌가 일어나는 것이 집성제이고, 번뇌를 여의는 것이 멸성제인 것이다. 열반으로 가는 지름길이 8정도(八正道)이므로 8정도는 도성제라고 할 수 있다. 8정도 중 정견(正見)은 다름 아닌 단견과 상견의 양변을 여읜 중도를 깨우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큰 깨달음을 얻으시고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나는 중도를 정등각(正等覺)했노라.”
이다. 이 말씀은 “나는 진리를 깨달아 우주의 일체 만상을 두루 아는 지혜를 체득했노라.”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진리란 진여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진여는 인간의 어떠한 개념도 초월해있기 때문에 형언할 수 없다. 진여의 작용원리가 바로 공(空)이다. 진여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이기 때문에 진공(眞空)이라고 하고 이것으로부터 만상이 다 나왔으므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이러한 우주의 진실은 양자물리학이 발달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하나씩 과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약 2,500여 년 전에 깨달으신 진리를 오늘날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를 회통시켜 하나의 말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중도(中道)이다.
중도를 증득하면 지혜가 완성되기 때문에 중도는 삶의 실천 덕목이라 할 수 있으며, 중도를 실천하는 것이 바로 앞서 설명한 팔정도와 육바라밀이다. 중도는 중도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진정한 중도이다. 그 이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양변을 여의고 원융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중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분별하고, 차별해서도 안 되며, 한 곳에 머물러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상(我相)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며, 무엇을 하든 바라는 마음 없이 무심하게 하여야 한다.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