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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설의 뿌리는 공(空) 사상

불심 도문 법사는 “연기설의 밑뿌리에는 공(空) 사상이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시각적 차이를 두고서 아뢰야식 연기설과 여래장 연기설은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달라지는 것이다. 현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음은 더럽혀져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바로 유식의 입장이다. 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보면 현실의 추한 마음속에도 성불의 씨앗은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여래장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 미혹한 중생의 입장에 서느냐, 깨달은 부처님의 입장에 서느냐 하는 전제에 따라서 이론의 구성방법도 달라지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는 비유컨대 달을 가리키기 위한 손가락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론에 집착하다 보면 자칫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만 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공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론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공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와는 다르다. 허무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부터 모순적이다. 허무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허무하다’거나 ‘허무가 있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고 해도 이 사상을 표현하는 ‘말’에 사로잡히면 그 사상의 본질을 간과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 공사상을 바로 이해하려면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시인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은 제한적인 시간의 세계이다. 하지만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세계를 정지적(靜止的)인 말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 사람이 흰 꽃을 보고서 ‘이 꽃은 희다.’고 말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꽃의 색깔이 언제까지나 흰 것은 아니다. 꽃이 조락을 앞두고는 색깔이 변할 수밖에 없다. 말은 표현하는 순간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다. 『중론』에 쓰인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은 심행(心行)이나 언어의 도(道)도 끊는다.’는 가르침도 언어표현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이 말뜻은 진실한 모습은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세계를 유동적인 시각으로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 유동적인 세계를 보고 있는 자신의 시각은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궁극적인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반야경』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는데, 이 일체개공의 가르침과 우리가 암송하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가르침은 크게 다르지 않다. 색즉시공에서 색(色)의 사전적 의미는 육체와 물질을 뜻한다. 하지만 색즉시공에서는 육체와 물질이 아닌 상대분별적 시각으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공(空)은 이러한 상대분별을 떠난 제일의적(第一義的)인 것이다. 우리는 사물이나 사건을 관찰함에 있어 상대분별의 색이라는 유(有)의 경우와 상대분별을 떠난 공의 경우를 취할 수 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시비·선악 등 상대적인 분별 판단은 불가피하다. 상대적인 분별 판단이 없다면 애초 사물을 판단하거나 고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에서 공(空)이나 무아(無我)를 강조하는 이유는 고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빠지게 되면 융통성을 잃게 된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편견에 집착하여 일부만을 보고 전체는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상대방의 처지나 형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므로 결국 다른 사람과 대립과 반목을 할 수밖에 없다. 무아를 역설하는 불교에서도 ‘아(我)’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라는 열반게를 남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아사상에서는 아(我)를 부정하면서도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가르침을 통해 자아를 의주(依主)하라고 하는 것은 모순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무아설(無我說)에서 말하는 아(我)란 고정화된 집착이 있는 자아를 일컫는다. 즉,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배제하라는 것이다. 반면 ‘자등명 법등명’에서의 자아는 집착을 떠난 것이므로 무아 내지는 무집착(無執着)의 진실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법구경』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을지언정 다른 이를 스승으로 삼지 말라. 자기를 잘 닦아 스승으로 삼으면 능히 얻기 어려운 스승을 얻는다.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왔고, 마음은 모든 것에 앞선다.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모든 것은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 뒤에는 슬픔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마치 수레바퀴가 마부의 뒤를 따르듯이.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기쁨이 그를 떠나지 않는다. 마치 그림자가 몸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허술하게 지붕을 이은 집에 비가 새듯이, 굳게 수련되지 않은 마음에 탐욕은 스며든다. 지붕이 잘 덮인 집에 비가 새지 않듯이 굳게 수련된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위 경구는 진실한 자아(自我)가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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