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도문 법사는 연기설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하나는 상호의존해서 이뤄진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과관계 속에서 현실의 근거를 밝힌다는 견해이다.
연기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설하면서 갈대 다발의 비유를 들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세상은 상호의존해서 이뤄져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자신이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삶은 그렇지 않다. 우선 자신이 받은 생명부터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부모도 생명을 준 부모가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기까지 수많은 조상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사회활동을 하기까지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뒤에는 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고 더 성장해서는 직장에 가거나 개인 사업을 한다. 사람을 일컬어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1차적으로는 가정이라는 사회에 구성되고, 2차적으로는 지역공동체, 학교공동체, 직장공동체에 소속되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서 ‘나’라는 자아가 성립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지 않고서는 자기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기심을 갖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이다 보니 타인과의 다툼이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흔히 불교에서는 아집(我執), 즉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연기의 상관관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부부관계를 예로 들면 남편과 아내라는 상호보완의 상대가 있기에 부부가 되는 것이지 남편만 있어도, 아내만 있어도 부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부부는 서로 상조해서 이루어지는 관계이다. 부부관계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는 상연(相緣) 관계, 즉 서로 상부상조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쪽이 있어야 저쪽도 있을 수 있고 저쪽이 있어야 이쪽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에 대해 초기불교 경전에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곳이 있을 때 저곳이 있으며, 이 생(生)이 있을 때 저 생이 있고, 이곳이 없을 때 저곳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
연기의 법칙은 땅속의 씨앗이 자라서 대지 위로 싹이 돋아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싹이 돋아난다는 것은 땅속에 씨앗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씨앗이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해서 절로 싹이 돋아나는 것은 아니다. 흙 속에서 적당한 수분에 의해서 습기를 얻고, 햇빛에 의해서 적당한 온도를 얻어야 씨앗은 싹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싹이 돋아나는 게 기(起), 즉 결과에 해당한다면, 땅속에 씨앗이 떨어진 것과 적당한 수분이 땅속에 스민 것과 햇빛에 의해 적당한 온도가 유지된 것이 연(緣), 즉 원인에 해당한다.
연(緣)은 사물이나 사건이 생기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여러 가지의 연(緣)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리켜 인(因)이라고 한다. 가령, 싹이 나오기 위해서 물이나 온도는 불가결의 연(緣)이지만 가장 중요한 연(緣)은 바로 씨앗이 땅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의 인(因)만으로는 사건이나 사물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연기의 지혜를 알게 되면 자신이 세상의 수많은 상호의존적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아가서는 자신과 연관된 다른 존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한 사람이 자신이 성공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리고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다른 사람들의 유형무형의 도움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할 것이고, 결국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의 손길을 펼칠 것이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원력이 있다. 이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권력욕이나 공명심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원력은 자신이 사회적인 상호관계에 의존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나면 절로 일어나는 원력이다. 이 세상은 상호의존적 관계로 구성돼 있다. 시간적으로는 아득한 과거나 미래와 연결되어 있고, 공간적으로는 이 지구는 물론이고 나아가서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일컬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한다. ‘중중무진’이란 수없이 겹쳐 있어서 끝이 없다는 의미이다.
도문 법사는 연기(緣起)의 두 가지 견해를 불교사상의 변천에 따라 설명하고 있다. 연기의 두 가지 견해 중 상호의존해서 이뤄진다는 견해는 대승불교에서 발전된 사고방식이다. 대승불교 경전인 『반야경』에서 역설하는 공(空)의 견해가 이에 해당한다. 천태종의 제법실상(諸法實相)에 대한 해석이나 화엄종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도 이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인과관계로 연기를 해석하는 견해의 예로는 원시불교의 12연기설, 남방불교의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 유식(唯識)불교의 아뢰야식 연기설과 여래장(如來藏) 연기설을 들 수 있다.
인과관계로 연기를 해석하는 견해는 미혹의 현실이라는 결과에서 그 원인을 찾기 때문에 보다 복잡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인과의 결과가 생기는 많은 원인이 있고, 그 많은 원인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원인의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에서 결과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서 원인을 거슬러 추론할 수밖에 없다. 비록 견해는 다르지만 연기설은 결국 하나의 가르침을 전한다는 게 도문 법사의 설명이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생기고, 바람이 멈추면 다시 물이 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에서 물결이 나므로 물결이 바로 물인 것입니다. 연기설을 믿는다면 남이 저지른 잘못이나 그릇된 행실을 보지 말고, 내가 저지른 잘못이나 그릇된 행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만 반듯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우나 향기가 없는 꽃과 같을 것입니다.”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