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도문 법사는 세납 11세에 18세인 종조모와 논쟁하였다. 당시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가르침을 역설하는 종조모에 맞서 도문 법사는 제불대게(諸佛大偈) 칠불통게(七佛通偈)를 역설하였다.
도문 법사의 종조모는 자연 임봉권 화백의 부인이다. 임봉권 화백은 천도교 의암 손병희 교주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런 까닭에 손병희 교주의 사위인 방정환 선생과도 의형제를 맺었다. 임봉권 화백이 의형제를 맺은 방정환의 딸과 혼인을 한 것은 기연이라고 할 수 있다. 임봉권 화백은 아버지(임동수)의 별장인 강원도 고성군 금강면 온정리 219번지 집에서 방영숙 여사와 신혼생활을 하였다. 당시 도문 법사는 국민학생이어서 임윤화라는 속명으로 불렸다. 어린 임윤화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되면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강산 별장에 가곤 했던 것이다. 하루는 방영숙 여사가,
“내 외할아버지 천도교 의암 손병희 교주는 기미년 3·1독립운동 때에 1번으로 서명을 하셨고 백용성 조사는 4번으로 서명을 하셨으니, 손병희 교주가 1등 인물이고 백용성 조사는 4등 인물이다.”
라고 주장했다. 또한 방영숙 여사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보다 빼어난 가르침은 없다. 사람이 하늘을 믿어 종래에는 하나가 되는 지경에 도달하는 것을 인내천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내천 사상이 있어서 기미년 3·1독립운동도 가능했던 것이고, 앞으로도 이러한 인내천 사상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맞서 어린 임윤화는,
“기미년 3·1독립운동의 막후기둥이 백용성 조사이다. 1등, 2등, 3등, 4등이 어디서 나왔느냐? 다 막후기둥에서 나왔다.”
고 주장했다. 또한 윤화는,
“천도교의 인내천은 지옥계(地獄界) 아귀계(餓鬼界) 축생계(畜生界) 아수라계(阿修羅界) 인간계(人間界) 천상계(天上界) 등 육도윤회(六道輪廻) 가운데 인간계와 하늘 세계인 천상계에만 국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육도 윤회를 벗어나서 불, 보살, 연각(緣覺), 성문(聲聞) 등 4성계(四聖界)로 가는 길이 제불대게요 7불통게이다.”
라고 주장했다. 어린 나이에도 도문 법사는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뿐만 아니라 아수라, 축생, 아귀, 지옥 등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서 불, 보살, 연각, 성문 등 4성계로 가는 길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불대게(諸佛大偈) 7불통게(七佛通偈)를 의역하면 아래와 같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모든 악업을 짓지 말고 많은 선업을 받들어 행하면서 절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도문 법사가 “3·1운동의 막후기둥이 용성 조사”라고 주장한 데는 이유가 있다. 용성 진종 조사가 독립선언 계획을 언제 알았으며, 언제 참여 의사를 밝혔는지는 불분명하다. 신문조서에는 ‘금년(1919) 2월 27일 한용운의 권유로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했다.’고 쓰여 있다. 용성 조사가 민족대표로 참여한 과정에 대해서도 역사학계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 대표로 추대할 만한 여러 선승들을 접촉했으나 모두 반응이 신통치 않자 마지막으로 2월 27일 용성 조사를 찾아가 참여를 권했고, 용성 조사는 두 말 않고 참여를 약속한 뒤 서명할 인장을 맡긴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3·1운동의 민족대표로서 참여하는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 봐서 목숨과 맞바꾸는 용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15세 연상인 용성 조사에게 불쑥 찾아가서 3·1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도 도리에 맞지 않다.
환경(幻鏡, 1887-1983) 스님이 3·1운동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참고로 환경 스님은 13세에 해인사로 출가하여 16세 전후에 이미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다. 여러 제방에서 정진했으며 친일승에 맞서 해인사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고경(古鏡, 1882-1943) 스님과 함께 해인사 학승들에게 몰래 조선 역사를 가르치다가 발각되어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19년 2월 20일 오세창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올라와 백용성, 한용운, 오세창 세 분을 만나 밀회를 하였다. 밀회의 참석자들은 조국의 장례를 걱정하고 현재의 긴박성을 공감하였다. 다른 참석자들이 ‘환경당은 어리니 만약을 대비하였다가 사식을 담당하고 (3·1운동) 이후 지하운동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여 지시받은 대로 3월 1일 명월관에서 나와 파고다 공원에서 ‘대한 독립 만세’ 삼창을 한 뒤 먼저 피신했다. 이어 고종황제 위령기도를 하고 있는 대한문에 가서 분향 독경하고 당일 출발하여 해인사로 내려와서 지하운동을 시작하였다.
환경 스님의 회고에 따르면 1919년 2월 20일 거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용성 조사도 있었던 것이다. 용성 조사는 만해 한용운 스님뿐만 아니라 오세창과도 3·1운동에 대해 논의했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용성 조사와 오세창은 각별한 사이였다. 비록 종교는 달라도 동갑인 데다가 뜻이 통했던 까닭에 용성 조사와 오세창은 막역한 관계를 유지했다. 동산 스님을 용성 조사에게 소개한 것도 오세창이었다. 오세창은 용성대선사의 비명을 직접 짓기도 했다. 윤병석이 지은 『3·1운동사』 부록 ‘3·1운동 관계’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돼 있다.
“2월 24일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이 최린을 방문하여 기독교와 천도교의 합동운동을 최종 합의함. 최린, 한용운이 불교 측의 합류를 최종 합의함. 불교 측 대표에 한용운, 백용성을 선출.”
2월 24일에 이미 불교 대표로 용성 조사가 선출됐다는 것이다. 이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2월 27일 용성 조사를 찾아가 동참을 권유했다는 주장과는 다른 내용이다.
만해 한용운 스님이 3·1운동 전후 당당하게 행동한 데는 나름 믿는 배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배후가 다름 아닌 용성 조사였다. 만해 한용운 스님은 용성 조사에게 가장 먼저 3·1운동을 준비하는 것을 상의하였을 것이다.
이런 정황 때문에 도문 법사는 『죽림』 제261호에서 ‘만해 한용운 대사는 용성 조사를 심중의 스승으로 모시고 호국을 담당하는 대용(大用)이 되고, 용성 조사께서는 호법을 담당하는 대체(大體)가 되었다. 이 대체와 대용이 굴리어져서 천도교와 기독교장로회와 기독교감리회, 그리고 불교 지도자들이 호국의 손을 잡게 되는 기미년 3·1독립운동 정신의 씨앗이 되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