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진종 조사의 사상은 동헌 완규(東軒完圭, 1896-1984) 조사에게 계승된 뒤 다시 불심 도문 법사에게로 계승되었다. 도문 법사는 용성 조사의 사상적 가르침에 대해 수직관계와 수평관계로 나눠 설명하고 있다.
용성 조사의 사상에서 수직관계는 부처님으로부터 용성 조사까지 이어져 온 석가여래부촉법(付囑法)을 일컫는다. 부처님이 전수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수한 석가여래부촉법은 마하가섭(Mahākāśyapa) 존자에서 이어져 28대인 달마(Bodhidharma) 대사에 와서 서역 인도에서 동토 중국으로 법맥이 전해지게 된다. 석가여래부촉법은 33세 육조 혜능(六祖慧能) 대사에게 계승된 뒤 이후 56세 석옥 청공(石屋淸珙) 스님에게 이어지니 중국의 정법안장으로는 28대 전등(傳燈)이다. 이후 석가여래부촉법은 57세 태고 보우(太古普愚) 스님으로 계승됨으로써 우리나라에 법맥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후 석가여래부촉법은 67세인 환성 지안(喚醒志安) 스님까지 계승되었다. 우리나라 11대 전등인 환성 지안 스님은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말미암아 영조 5년(1729)에 순교함으로써 정법안장이 숨을 수밖에 없었다. 환성 지안 스님의 후신으로 태어난 것이 바로 용성 조사이니, 이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쓴 용성 조사의 비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용성 조사가 환성 지안 스님의 후신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는 데는 도문 법사의 속가(俗家) 법연(法緣)이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영조는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두문동(개성) 72현(賢)의 충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하였다.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내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曺義生), 성사제(成思齊) 등 72명의 고려 충신을 일컫는다.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두문동에 들어와 마을의 동쪽과 서쪽 문에 빗장을 걸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순절하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1740년에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내려 두문동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72현의 후손들에게 제사에 참석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임선미 태학사의 13세손인 임상복도 참례하였는데, 정조는 임상복에게 종2품 문관의 품계인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내렸다. 도문 법사는 임상복 가선대부의 7대 손자이다.
정조는 1783년 개성의 성균관에 두문동 72현의 위패를 모시는 표절사를 세워 추모하였다. 당시 임상복 가선대부가 좨주(祭酒)로서 제사를 집전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조는 한성판윤 이서구(李書九)와 나라의 장래를 논의하였다. 이서구는 정조 17년(1793) 임상복을 찾았다. 이서구는 “단군의 고조선 이래 조선왕조까지 4,000여 년 동안 군주제도가 이어지다가 천지개벽의 운도로 민주제도가 시작되고, 우리나라는 800년 동안 대운을 받게 된다.”는 예언을 믿었다. 이러한 예언은 도선 스님이 지은 『도선비기(道詵祕記)』에 쓰인 것은 물론이고 무학대사를 비롯한 여러 예언가들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서구는 임상복에게,
“3대에 걸친 적선으로 죽림촌에 탄생할 석가여래부촉법 제67세 환성 지안 스님의 후신을 맞을 수 있도록 하라. 그런 뒤에도 3대에 걸친 적선 공덕을 쌓아야 죽림촌에서 탄생하는 도인의 유훈을 받들어 행할 성문승이 태어날 수 있다.”
고 당부하였다. 임상복 가선대부와 자손들은 이서구의 당부대로 6대에 걸쳐 적선 공덕을 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환성 지안 스님의 후신인 용성 조사가 죽림촌에서 탄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용성 조사의 법손인 도문 법사의 출생까지 볼 수 있었다.
용성 조사는 14세에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몽중불수기(夢中佛授記)를 받고서 남원 지리산 용천사 산내 암자인 덕밀암에 출가하였다. 당시 덕밀암에는 혜월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혜월 스님은 용성 조사를 보자 “백씨 소년이 왔구나.”라고 반가워했다. 덕밀암은 동학의 창도주인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혜월 스님과 함께 선천의 군주제도의 문호를 닫고 후천의 민주제도의 문호를 여는 데 의견을 함께 한 곳이었다. 혜월 스님은 최제우 대신사와 뜻을 함께 했다는 이유로 덕밀암에서 일종의 귀양살이를 살고 있던 터라 정해진 곳 말고는 다닐 수 없었다. 당시 혜월 스님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임상학 공과 박씨 부인의 외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혜월 스님은 백 행자(용성 조사)를 거느리고 임상학 공의 집에 방문했다. 임상학 공에게는 13세의 셋째 아들인 임동수가 있었다. 백 행자와 임동수는 만나자마자 지음(知音), 즉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 되었다. 이후 임동수는 평생 동안 용성 조사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용성 조사의 수직적 사상은 부처님으로부터 시작된 석가여래부촉법이 용성 조사에게 이어진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가 하면, 용성 조사의 수평적 사상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의 위신력과 가피력으로 우리나라에 800년 동안 대운이 들어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 행복해지는 것이다. 도문 법사는 그 시점을 용성 조사의 160회 탄생일인 2024년 음력 5월 8일로 특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800년 동안 대운이 들기 위해서는 전 국민이 악업을 그치고 선업을 닦는 지악수선(止惡修善)의 수행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 800년 동안 대운이 들면 집집마다 태어나는 아이들은 비록 겉모습은 사람이나 속마음은 보살이어서 대한민국은 절로 불국토가 된다.”는 게 도문 법사의 설명이다.
용성 조사의 수직·수평적 사상의 구현을 위해서 도문 법사는 평생 동안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事目)을 실천해왔다. 특히, 유훈 10사목 중 1사목부터 4사목까지는 가야불교, 고구려불교, 백제불교,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성지를 가꿈으로써 조사의 은혜에 보답하라는 것이었다.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