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 도문 법사는 1972년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의 불교 초전법륜성지를 가꾸기 시작했다.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 중 세 번째는 백제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라는 것이었다.
『삼국유사』 「난타벽제」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종합하면, 백제의 불교 전래는 아래와 같다. 백제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인도의 마라난타 스님이 중국 동진을 거쳐 백제의 서울인 남한강변 한주(漢州)에 이르니 침류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마라난타 스님을 친히 환영하여 궁중에 모시고 극진한 예로써 공경하였다. 이듬해에 한주에 절을 짓고 득도한 승려가 10명이었으니 이것이 백제불교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백제 제17대 아신왕이 즉위한 해(392) 2월에 백성이 불법을 믿고 받들어서 복을 구할 수 있게 하라는 교칙을 내렸다. 마침 마라난타 스님은 서역 인도와 동토 중국을 거쳐 해동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다가 기후와 음식이 맞지 아니하여 생기는 수토병으로 고생하였다. 이에 약수를 찾아 우면산 기슭에 대성초당을 짓고, 생수를 마시고 수토병을 고친 뒤 주석하였다.
이러한 사료에 기초하면 백제불교 초전 법륜성사는 마라난타이고 백제불교 초전 법륜성지는 서울 서초동 우면산 기슭의 대성초당지라고 할 수 있다. 대성초당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하여 폐허가 됐으며, 이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후손인 개성 왕씨 집성촌이 차지하게 되었다. 1911년 2월부터 용성 조사는 대성초당 터에 대성사를 짓고 주석하셨다. 용성 조사가 주석하신 까닭에 대성사는 3·1운동의 진원지가 되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대성사는 3·1운동 이후 일본 헌병대에 의해 소실되었다.
백제불교초전법륜 성지- 우면산 대성사
용성 조사는 우면산에 자생하는 진달래 옆에 무궁화를 8년여 동안 심어 무궁화동산을 만들었다. 애초 무궁화동산에는 잣나무가 우거져 있었으나, 조선총독부가 남산의 소나무를 벨 때 우면산의 잣나무도 모두 베어버렸다. 잣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잡목을 심었다. 이는 일제가 우면산의 정기를 없애려고 벌인 간교한 계략이었다. 이후 민간인의 소유가 된 우면산 대성사를 도문 법사가 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의 후원을 받아 매입한 뒤 ‘백제불교 초전법륜성지 우면산 대성사’로 등기 완료하였다.
우면산 대성사 관련 토지 매입은 총 5차에 걸쳐 이뤄졌다. 1차에는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총 3필지 1,818㎡(550평)와 등기상 17평의 법당 1동, 19평의 요사채 1동, 5평의 요사채 1동과 미등기된 318평의 해우소 1동과 창고 8동을 매입했다. 당시 법당과 요사채의 보수는 쌍용 창업총수 성곡 김성곤 회장의 부인 선생화 김미희 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 고문의 시주로 진행됐다.
2차에는 총 3필지 10,567평을 매입했다. 이는 유훈실현후원회 최사달 초대회장이 조상의 위토로 매입한 것이었다. 3차에는 임야 568평을 매입했다. 이는 대성사 신도회 대법화 정영애 회장과 법인화 정영순 사무국장의 시주와 대성사 광명인등비로 매입한 것이었다.
4차에는 임야 3,861평을 매입했다. 이는 대성사 신도회 대광 유종혁 회장과 보련화 임강자 고문 내외와 최사달 초대회장 등 뜻있는 대성사 신도들의 후원금으로 매입한 것이었다. 5차에는 768평을 매입했다. 5차에 걸쳐 매입한 대성사의 부지는 총 10필지 16,314평이었다. 대성사의 부지가 개발제한구역이어서 불사 과정에서 여러 행정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결국 대성사는 대웅보전 33평, 요사 1층 156평, 요사 2층 156평 등 총 345평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1993년 4월 3일 대성사 목조아미타불이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다.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 중 네 번째는 신라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라는 것이다.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의 불교 전래는 아래와 같다. 신라 제19대 눌지왕 시대에 묵호자 사문(沙門)이 신라 일선군 모례 장자의 집에 왔다. 모례 장자는 묵호자를 맞이하여 집안에 굴실을 만들어 편히 지내게 하였다. 공주가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인데 묵호자가 그 병을 고쳐주고 얼마 후 간 곳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신라 제21대 비처왕 때에 아도 화상이 시자 3인과 함께 역시 모례 장자의 집에 오셨는데 묵호자 사문과 똑같았다.

신라불교초전법륜 성지 - 아도모례원
아도 화상이 수년 뒤 병도 없이 입적하시고 시자 3인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경장과 율장을 강설하여 독송하니 이를 믿고 받드는 자가 있었다. 따라서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사는 아도 화상이고,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지는 모례 장자의 집터인 경상북도 구미시 도개면 도개2리 347번지 일대라고 할 수 있다.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지인 모례 장자의 구지(旧址) 모례샘[毛禮井]은 용성 조사가 23세 되던 해(1886) 음력 8월 5일 이차돈 성사의 순교의 날에 용맹결사 정진을 시작하여 음력 8월 29일 크게 깨달은 성지였다.
유훈실현후원회 고문 김미희가 폐허가 된 성지인 아도모례원 모례샘 주위 민가를 매입하여 도량으로 꾸미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유훈실현후원회의 뜻 있는 회원들의 후원으로 모례샘 인근 부지를 차례대로 매입했다. 도문 법사가 구심점이 되어서 매입한 신라불교 초전법륜지는 총 15필지 4,877평이었다. 13필지 3,281평은 신라불교 초전 법륜성지 아도모례원으로 등기하여 도량으로 조성하였고, 2필지 1,596평은 신라불교 문화 초전지 조성사업 부지로 구미시에 기부하였다. 아도모례원에는 55평 규모의 신라불교 초전 기념관과 68.5평 규모의 관리사가 건립됐다.

모례정(毛禮井) - 아도모례원
1994년 4월 29일 모례샘이 경상북도 문화재위원회 위원들의 만장일치 결의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선산군과 구미시가 병합하여 구미시로 명칭이 바뀌었고, 김관용 구미시 시장, 남유진 부시장, 신영근 공보담당관의 주도로 구미시 시비를 들여 신라불교 초전법륜성지 모례샘 주변 환경을 정비하였다. 이후 구미시는 성역화 사업을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 중 첫 번째는 가야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라는 것이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사적기에 따르면 가야의 불교 전래는 아래와 같다. 서기 48년 서역 천축 아유타국 허황옥 공주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불사리를 봉안한 파사탑을 배에 싣고 와서 가야국 김수로 대왕과 혼인하였다. 공주가 김수로 대왕에게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 아유타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내외가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하늘의 상제께서 나타나 가락국왕 김수로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한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그 배필을 삼게 하라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꿈을 깨고 난 뒤에도 하늘 상제의 말씀이 오히려 귀에 쟁쟁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가락국을 향해 떠나라.’ 그래서 저는 바다로 가서 배를 타고 가락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공주의 말을 듣고서 김수로 대왕은,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신성하여 공주가 먼 곳으로부터 올 것을 미리 알았으므로 신하들에게서 왕비를 맞이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굳이 듣지 않았소.”
라고 대답했다. 김수로 대왕은 공주와 혼인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김수로 대왕과 허황옥 왕후의 사이에는 열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첫째 왕자는 제2대 거등 대왕이 되어서 김해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姓)인 허씨로 사성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명의 왕자는 외삼촌인 장유화상을 따라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동 176번지 일대의 가야불교 초전법륜성지 가야정사에서 출가하였다. 가야불교 초전법륜성지인 가야정사가 바로 구산선문 중 제8 봉림산 선문인 봉림산 봉림사 봉림선당지인 것이다.
가야불교초전법륜 성지 - 봉림사 봉림선당지
도문 법사는 민간인 소유의 밭과 논으로 전락된 것을 유훈실현후원회의 후원으로 매입할 수 있었다. 당시 매입한 필지는 총 20필지 4,129평이다.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문화재위원회 위원들의 만장일치 결의로 봉림사지 6필지 2,114평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되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총 4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9금동불상, 청동 불상, 봉림사명, 기와류 다수 등 246점이 출토되었다.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봉림사지발굴조사보고서를 발간했다.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은 고구려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라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불란사지(伊佛蘭寺址)가 중국 길림성에 소재해 있어 이 유훈을 실현할 수 없었다. 『삼국유사』 「순도조려」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에 관중 장안에 도읍을 정한 전진(前秦)의 부견대왕이 사신과 순도 대사를 파견하여 불상과 불경을 함께 모셔왔다. 소수림왕 4년(374)에는 아도 화상이 진나라에서 고구려로 오셨다. 그 이듬해 2월 성문사를 창건하여 순도 대사를 계시게 하였고,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 화상이 계시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 불교의 시초이다. 중국 길림성에 소재한 이불란사를 중창하는 것은 아무리 간절한 비원(悲願)을 지닌다고 해도 실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1992년에는 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였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 국내성의 성문사지(省門寺址)와 이불란사지를 순례한 뒤 길림성 조선족 자치주 연변 용정시 대각사 포교원지, 중국의 수도 북경 관음사지 등을 순례하였다.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도문 법사는 유훈실현후원회 회원들과 함께 순례를 하였지만 시절인연이 도래하지 아니하여 고구려불교 초전법륜 폐허성지를 가꾸는 유훈을 실천할 수 없었다.
또한, 중국 하남성(河南省) 신정시(新郑市) 시조산(始祖山)에 인문초조이신 황제 헌원 중천각(中天閣) 예배전을 건립하는 데 미화 19만 달러를 후원하였다. 당시 한국의 수원 백씨 화수회에서도 미화 1만 달러를 기증하였다. 황제 헌원 중천각 예배전이 건립되자 도문 법사는 낙성 회향법회를 성대하게 봉행하였다. 이러한 후원을 통해 중국, 한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인의 씨족원류가 동근동본(同根同本)이요, 동원동리(同源同理)임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
중국 시조산 황제헌원중천각 예배전에 용성조사 시조산 제11대 명인비 제막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