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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에서 맺은 줄탁동시(啐啄同時)의 법연

강원도 지역에 불법의 꽃씨를 6년 동안 뿌린 뒤 오대산 월정사 적광전의 상량식을 마치고 불심 도문 법사는 1967년 경북 경주 명활산 분황사로 주석처를 옮겼다. 분황사는 9산선문 중 하나로 원효(元曉, 617-686) 스님이 창건한 법성종 종찰이다. 분황사의 전임 주지는 다름 아닌 은사인 동헌 조사였다. 동헌 조사는 당시 대한불교조계종을 이끌고 있던 청담 스님, 능가 스님과 상의한 끝에 용성 진종 조사의 유훈 10사목을 실현하기 위해 분황사 주지로 부임했던 것이다. 동헌 조사는 도문 법사가 탄허 스님의 문하에서 월정사 적광전 복원불사를 돕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정사 복원불사를 돕는 것은 한암 스님의 유훈이기도 했다. 월정사 적광전 상량식을 봉행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곧바로 동헌 조사는 도문 법사를 분황사로 불러들였다. 1967년 음력 3월 21일 봉행된 분황사 주지 진산식에는 여러 대덕고승들이 참석했는데, 그 중 한 분이 서옹 석호(西翁石虎, 1912-2003) 스님이다. 서옹 스님은 백양사 조실 만암 종헌(曼庵宗憲, 1876-1956)의 상자 겸 수법제자로서 당시 대구 팔공산 동화사 조실로 계시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주지 진산식에 참석한 서옹 스님의 곁에는 대구 동화사와 영천 은해사 화주인 보련화 보살이 있었다. 서옹 스님은 보련화 보살을 분황사 원감으로 추천하면서, “분황사 불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우라” 고 했다. 이후 보련화 보살은 동화사와 은해사의 신도인 3,000여 명을 분황사 신도로 등록하게 하여 분황사 인근의 전답과 민가를 매입해 도량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보련화 보살은 분황사의 도량 정비뿐만 아니라 약사여래불을 봉안한 분황사 보광전을 보수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보련화 보살이 의성 고운사 포교당인 관음사 신도회장인 청정행 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에 청정행 보살이 단독으로 분황사 보광전의 보수 불사금을 시주했다.
불심 도문 법사와 법륜 스님
도문 법사는 분황사 주지로 재임할 당시 법륜 스님과 사제(師弟)로서의 법연을 맺었다. 하루는 당시 경주고등학생인 최석호가 인사를 와서, 살펴보니 법기(法機) 즉 안으로는 높은 깨달음을 이루고 밖으로는 널리 중생들을 교화할 관상이었다. 은사인 동헌 조사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는지 최석호가 떠난 뒤 이렇게 말했다. “최석호 학생은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잇고 있는 용성 조사, 동헌 조사, 도문 법사 3대 전등(傳燈)의 교량의 뒤를 이어나갈 인물입니다. 그러니 도문 법사는 반드시 최석호 학생을 상좌 겸 수법제자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崔濟愚) 대신사가 100년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다고 합니다. 최석호 학생 역시 최제우 대신사에 못지않은 안목이 있어 보입니다. 도문 법사가 상좌로 받아들여서 가르치면 금세 줄탁동시(啐啄同時)하여서 훌륭한 법기가 될 것입니다.” 줄탁동시는 병아리가 알에서 부화하기 위해서는 어미 닭도 병아리와 함께 안팎에서 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불가(佛家)에서는 깨달음을 전하고 받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동헌 조사의 말씀을 듣고 도문 법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동헌 조사가 자신한테 누구를 상좌로 받아서 법맥을 계승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뒤 다시 사찰을 찾은 최석호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더니, 천문학자가 되어서 우주의 비밀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도문 법사는 최석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최석호도 지지 않고 도문 법사를 바라봤다. 도문 법사가 다시 입을 뗐다. “작디작은 물질의 최소입자가 어떻게 생기고 사라지는지 탐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고, 넓디넓은 우주가 어떻게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지 탐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게 있어. 바로 자신을 아는 거야. 너는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에 어디에 있었지? 그리고 죽은 뒤에는 어디로 돌아가는 거지?” 당시 최석호에게 물은 것은 당나라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 스님이 제자인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 스님에게 내린 공안인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즉, ‘부모님이 낳기 전의 네 본래 모습은 무엇이냐’이다. 이 말을 듣더니 최석호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최석호가 바로 법륜 스님인 것이다. 출가한 법륜스님은 분황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면서 경주고등학교를 통학하여야 했다. 며칠 뒤 법륜 스님의 어머니가 분황사를 찾아와, 출가를 하더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도문 법사는 법륜 스님의 어머니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보살님, 만약에 석호 학생이 죽을병에 걸리면 보살님이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출가한 스님의 본분은 삶과 죽음의 고통을 여읜 길을 찾고 중생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석호는 타고난 법기이니 걱정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 석호가 출가해 스님이 되면 인천의 스승이 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어머니가 뜻을 접고 집으로 돌아갔다. 법륜 스님은 영남불교 중·고등학생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었다. 도문 법사가 법륜 스님에게 시킨 일은 경주 시내 6개 중·고등학교의 교사들과 경주시내 각 동사무소 직원에게 용성 조사가 상세히 번역한 경전들을 무상으로 나눠주는 것이었다. 법륜 스님이 나눠준 용성 조사의 경전을 받은 사람 중에는 당시 경주 남산 칠불암의 관리인인 법련화의 손자도 있었다. 칠불암은 보물 제200호인 삼존불상과 제199호인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었다. 법련화의 손자 김덕봉은 경주시 공무원이었던 까닭에 『상역과해금강경』을 받았다. 그는 화엄성중(華嚴聖衆) 39위 조성 전문가인 김만춘 화백의 아들이기도 했다. 김덕봉은 경전을 받고서 법륜스님에게 분황사 주지 스님의 속가 성씨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김덕봉의 할머니인 법련화는 기도 끝에 예지력을 지니게 됐다. 하루는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불모(佛母)인 네 아들에게 화엄성중을 지속적으로 그리게 해라. 완성된 화엄성중 그림은 불에 태워라. 그래야만 화엄성중이 대한민국의 국토를 수호할 수 있다. 절대로 그림이 불에 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마라. 훗날에 쌍 목(木)자를 지닌 성씨의 도인이 나타나서 그림값을 줄 것이다. 임(林)씨 도인이 나타나면 칠불암의 한 나무에는 불타의 깃발이 휘날리고 다른 한 나무에는 조사의 깃발이 휘날릴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 법련화는 아들인 김만춘을 불러서 관세음보살의 지시를 말했다. 김만춘은 불화를 그렸으면 팔아야지 왜 태우냐, 그러면 인건비는 물론이고 재료비도 남지 않는다고 반문했다. 법련화는 관세음보살님이 훗날에 쌍 목자 지닌 성씨의 도인이 나타나서 그림값을 줄 것이라고 하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이런 사연이 있었던 까닭에 김덕봉은 관세음보살이 할머니에게 말한 쌍 목자를 지닌 성씨의 도인이 바로 도문 법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김만춘이 칠불암을 소유하고 있었다. 김덕봉은 분황사를 찾아와 도문 스님을 만난 뒤 가계의 내력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법륜 스님은 김덕봉 공무원과 분황사 원감인 보련화 보살의 만남을 주선했다.
경주 남산 칠불암 신선대에서 수행
대구에 거주하는 전진 메리야스 사장인 법련성 보살이 분황사 불사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대구 대원사 신도회장 출신인 법련성 보살은 자신의 회갑을 기념해 탱화조성 관련 부채 전액을 상환해 주었다. 법련화 보살이 임종하자 대를 이어서 남산 칠불암 관리하던 김만춘 화백은 이후 경주시 남산동에 소재한 저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저택 매입과 이사 비용은 분황사 원감 보련화 보살, 최사달 회장, 임태순 초대부회장 등이 후원했다. 분황사 원감 보련화 보살은 경주 남산 칠불암에 부처님의 기와 용성 조사의 기를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공덕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움에 힘입어 개인소유의 칠불암을 매입해 조계종 사찰로서 일신할 수 있었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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