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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정사 성역화를 실현하다

불심 도문 법사는 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를 설립한 뒤 지도법사를 맡아 법사단, 고문진, 회장, 화주진(化主陳) 등을 구성하고 뜻 있는 회원들을 모집한 뒤 장안산 아래 죽림촌을 성역화하였다. 용성 조사의 생가가 사라진 이유는 일본인들이 불을 질러서 태웠기 때문이다. 도문 법사는 부는 바람에 잡초들만 스적이는 용성 조사의 생가터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하여 장수군청을 찾아가 장수군수와 면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조국 광복 이후 지금까지 용성 조사의 생가가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실로 한탄할 노릇입니다. 지금이라도 용성 조사의 탄생성지를 성역화해야 합니다. 군수님과 용성 조사의 생가 복원에 대해 의논하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장수군수는 담당 과장과 계장을 부른 뒤 도문 법사가 찾아온 이유에 대해 듣게 하였다. 그런데 장수군 담당 직원의 답변이 뜻밖이었다. “용성 조사의 생가터는 현재 지목이 전(田)이어서 복원을 할 수 없습니다. 생가를 복원하려면 전을 대지로 변경해야 합니다. 그러니 생가터에 돈사(豚舍)를 지어서 돼지를 키우다가 대지로 변경하는 게 좋겠습니다.” 도문 법사가 듣기에는 어이가 없었다. “용성 조사는 3·1운동의 대표자이자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계승한 분입니다. 그런 분의 생가터에 돼지우리를 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만약 생가터에 이미 돼지우리가 지어져 있다고 해도 하루빨리 철거하는 게 옳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서 장수군 담당 직원이 화를 내며, 대한민국의 법률상 밭에는 어떠한 건물도 지을 수 없으니, 스님의 판단이 대한민국의 국법 위에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104조사도(祖師圖) 벽화 중 일부 - 죽림정사 용성교육관
도문 법사는 ‘인간의 법으로 불가능하다면, 부처님의 법으로라도 가능케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용성 조사의 생가터로 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좌선하기 시작했다. 불보살님의 가피력으로라도 용성 조사의 탄생성지를 복원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름날이어서 모기들이 달려들어 온몸을 물어뜯었다. 소식을 들은 용성조사유훈실현위원회 초대회장이 부리나케 용성 조사 탄생성지로 뛰어왔다. 회장은 도문 법사의 어머니인데다가 그 누구보다도 용성 조사를 존경하는 까닭에 그 상황을 모른 척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회장은 둘째 딸인 보련화 임강자와 둘째 사위인 대광 유종혁 고문을 대동하여, 함께 온 대광 유종혁 고문, 보련화 임강자 내외, 서명원 전 문교부장관의 부인이신 대각심 임태순 부회장, 용천 박시민 고문, 수승행 한명옥 회장 내외분 등과 함께 논의해서 용성 조사 생가의 복원에 앞장설 테니 걱정 마시고 그만 일어나시라고 간청했다. 회장의 말대로 용성 조사의 생가 성역화에 유훈실현위원회가 앞장섰다. 우선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 소재한 용성 조사의 생가터가 민간인의 소유로 돼 있는 것을 그 토지주인을 만나 설득한 끝에 매입하였다. 이후 생가터 주변의 민가 9가구를 순차적으로 만나 매입하고 인근의 논밭 등 토지 11,993㎡(3,627평)과 건물 8동 1,366.75㎡(413.44평)도 매입함으로써 죽림정사 성역화 불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용성기념관 – 죽림정사
용성 조사 생가의 성역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데는 이강훈 광복회 회장의 도움이 컸다. 광복회장은 1903년 강원도 김화군에서 태어나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돼 고초를 치렀다.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업을 도왔다. 광복회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당시 초대 국무총리인 이동휘의 비서 역할을 했다. 도문 법사가 자신이 승가(僧家)로는 용성 조사의 손상좌이고, 속가(俗家)로는 사은(士殷) 임동수(林東壽)의 증손자임을 알리자 광복회장은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을 글썽이면서 도문 법사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의 증조부께서 9,000석을 후원한 덕에 순조롭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용성 조사는 3·1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용성 조사의 생가를 성역화하는 뜻깊은 사업에 동참하지 않겠습니까?” 광복회장은 도문 법사에게 3·1운동이 열리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광복회장에 따르면, 천도교 신자들만으로 3·1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던 천도교 의암 손병희 교주를 만류한 것이 용성 조사라고 한다. 용성 조사가 손병희 교주에게, “독립운동은 천도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온 민족이 함께 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따라서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가 합심해서 독립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의암 교주가 수운 최제우의 법손이라면 저는 송월당 혜월 화상의 상좌입니다. 최제우가 지리산 용천사 은적당 조실에서 혜월 화상과 함께 군주제도에서 민주제도로 천지개벽의 문호를 여는 데 뜻을 함께 했듯이 불교, 기독교, 천도교 등 종교계 대표 33인이 민족대표로 나서야 합니다.” 라고 역설했다는 것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를 33인으로 정한 까닭은 도리천의 33천 하느님이 보우하길 바라는 의미에서였다. 임동수 공이 중국에 가서 상주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9,000석을 후원한 것도 대한제국이 멸망하면 선천의 군주제도를 종결짓고 후천의 민주제도를 열고자 하는 굳건한 신념 때문이었다. 이강훈 광복회장은 유흥수 광복회 사무총장을 부른 뒤, 도문 법사의 일을 돕도록 지시했다. 광복회장은 곧바로 김상두 장수군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군수님, 도문 법사님은 임동수 공의 증손자입니다. 임동수 공의 경제적 지원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수립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도문 법사님은 3·1운동을 주도한 용성 스님의 손상좌입니다. 이런 도문 법사님께서 용성 스님의 생가를 복원하고 성역화하고자 하니, 군수님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용성교육관 - 죽림정사
김상두 군수는 이강훈 회장에게 며칠 뒤 용성 조사의 생가터에서 보자고 약속했다. 약속한 일시에 이강훈 회장, 유흥수 사무총장, 최사달 회장 등과 함께 장수군수를 만났다. 이강훈 회장이 잡초만 우거져 있는 용성 조사의 생가터를 보더니 감정이 북받치는지 눈물을 흘렸다. 이 모습을 보자 군수는 숙연한 표정을 짓더니 용성 조사의 생가 복원과 성역화를 약속했다. 김상두 군수는 애국심이 깊고 신실한 사람이어서 이후 지속적으로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1997년 11월경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이 기념사업회의 초대이사장은 대광 이사장 유종혁이 맡았고, 초대이사는 유흥수 광복회 사무총장, 도문 법사, 세계불교 청소년 교육교화후원회 제6대 회장·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 제4대 회장 수승행 한명옥이 맡았다. 초대임원으로는 김진영 장수군 문화원장, 정영신 번영회 회장, 초대감사로는 이준석 법사, 유훈실현후원회 제2대 회장 원일화 김금화가 이름을 올렸다. 김상두 장수군수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장수군 군비, 전라북도 도비, 국가보훈처 국비 등 60여억 원과 유훈실현후원회 후원금 60여억 원 도합 120억 원으로 생가를 복원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1998년 4월 3일 백용성조사 유허비(遺墟碑) 제막식이 열렸다. 김상두 군수의 지시로 유허비는 장수군의 군비로 세워질 수 있었다. 같은 해 10월 29일 백용성 조사 생가 착공식이 열렸다. 1999년에는 죽림정사 대웅보전이 준공되고, 용성교육관[조사전祖師殿]이 착공되었다. 2000년에는 용성교육관 상량식과 백용성 조사 생가 준공식이 봉행되었다. 용성 조사 생가는 본채 20평, 아래채 30평 크기로 지어졌으며, 백용성 조사 생가 낙성회향법회에는 중국 하남성 해외교류협회 임설매 명예주석, 임견 비서장 등 국내·외 내빈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생가 준공에 앞서 1,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입주식 법회를 성대하게 봉행하기도 했다.
죽림정사 전경
같은 해 6월 16일 사단법인 독립운동가 백용성조사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이 기념사업회는 도문 법사가 유흥수 사무총장에게 제안해 설립될 수 있었다. 도문 법사의 제안에 유흥수 사무총장은 흔쾌히 팔을 걷고 나서 도와줬던 것이다.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은 도문 법사의 매제가 맡아줬다. 농장을 운영했던 스님의 매제는 자진해서 죽림정사의 산림을 조경하였다. 2004년에는 죽림정사 대웅보전 낙성회향, 용성기념관 개관, 용성교육관 건립, 죽림정사 종무소, 해우소 건립 등 다양한 불사를 완료하였다. 같은 해 용성 조사가 창건한 무주 향산사 향산선원의 중창불사를 지원하기도 했다. 2005년에는 104조사도(祖師圖) 조성 봉안 점안식이 봉행됐다. 104조사도란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용성 조사까지 계승돼 온 석가여래부촉법(釋迦如來付囑法), 석가여래부촉계대법(釋迦如來付囑系代法), 조선불교중흥율(朝鮮佛敎重興律)의 법맥의 진영(眞影)들을 일컫는다. 2007년에는 용성 조사 탄생성지인 죽림정사의 종합 준공식이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성대하게 봉행되었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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