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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대각회를 문교부에 등록하다

불심 도문 법사의 포교 업적 중 첫 번째로 손꼽을 것은 용성 조사의 추모 선양 사업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문 법사의 생애는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十事目]을 실현하는 데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유훈 10사목의 대부분이 불사와 포교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훈 10사목은 아래와 같다. ① 가야불교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어라. ② 고구려불교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어라. ③ 백제불교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어라. ④ 신라불교초전법륜 폐허성지를 잘 가꾸어라. ⑤ 신라고도 성지 남산과 진산인 낭산을 잘 가꾸어라. ⑥ 호국 호법도량 남산 중 고위산 천룡사지를 잘 가꾸어 수도발원 교화도량의 언덕으로 삼아라.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신 네팔 가비라 룸비니원과 성도하신 보드가야 보리수원과 최초 설법 성지인 바라나시 녹야원과 주석 성지인 기원정사와 입멸하신 구시나가라 사라쌍수원인 불교 불적 5대 성지를 잘 가꾸어라. ⑦ 불타의 경전과 조사의 어록을 1백만 권이 넘도록 발간 유포하라. ⑧ 삼귀의 오계 수계 법회를 통하여 수계자가 1백만 명이 넘도록 할 것이며, 이 수계자에게 아들 때나 손자 때나 증손자 때에 한 아들이나 한 손자나 한 증손자를 잘 낳고 기르고 가르쳐서 부처님 전에 바쳐 출가 봉공하게 하라. ⑨ 온 겨레 전 인류 1만 중생과 성불인연을 지으라. ⑩ 안으로 수행은 비묘엄밀하게 하고, 교화는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하되 악한이나 선한 이를 가리지 말고 인연 따라 승려를 만들고 잘난 이나 못난이를 가리지 말고 인연 따라 신도를 삼아 찬양도 받으면서 비방도 함께 받아 모두 다 수용해서 『묘법연화경』 제20 「상불경보살품」의 상불경보살의 수행을 본받아 성불인연을 지어 나가라.
고구려불교초전법륜지 순방 - 중국 집안시에서
용성 조사는 수직적으로는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이어서 전법하였고, 수평적으로는 온 겨레, 전 인류, 만 중생이 성불의 인연을 지을 수 있도록 가르쳤다. 용성 조사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서 평생 대한민국 수립에 앞장서 왔다. 그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는 등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에 왜색불교에 물들어 결혼과 육식을 일삼는 불교계에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하였다. 청정한 승가의 가풍을 복원할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또한, 어려운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대중이 부처님 가르침의 은혜를 골고루 받을 수 있게 했다. 전 국민을 창씨개명하려는 일제의 음모를 직시한 용성 조사가, “아하! 큰 물고기인 자치가 작은 물고기인 자치를 잡아먹는구나! 쇠에서 녹이 슬어 상하는구나! 사자 뱃속에서 충이 생겨 쓰러지는구나!” 라고 한탄한 것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바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1939년 2월 23일 저녁, 입멸이 머지않은 것을 예감한 용성 조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법제자인 동헌 완규(東軒完圭, 1896-1984) 조사에게 아래와 같은 열반게를 읊었다.
諸行之無常 모든 행이 떳떳함이 없고 萬法之俱寂 만법이 다 고요하도다. 匏花穿籬出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閑臥麻田上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웠도다.
용성 조사는 위 열반게를 통해 자신이 갈 곳을 일러줬다면, 유훈 10사목을 통해서는 자신이 이 사바세계에 온 이유를 일러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훈 10사목이야말로 용성 조사가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동시에 정신적 사리라고 할 수 있다. 용성 조사는 입멸 직전 동헌 조사에게 자신의 49재를 마친 뒤 펴보라며 서신(書信)을 전했다. 용성 조사의 49재를 마친 뒤 동헌 조사는 봉인된 서신을 열어봤다. 서신에 쓰여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유훈 10사목이었다. 은사의 유훈인 까닭에 동헌 조사는 1961년 음력 6월 14일 금정산 범어사에서 도문 법사에게 법을 전한 뒤 유훈 10사목 실현을 강조하였다. 이에 도문 법사는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 실현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왔던 것이다.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용성 조사가 설립한 대각회를 법인으로 등록해야 했다. 1969년 9월 11일 도문 법사는 은사인 동헌 조사를 모시고 용성 조사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재단법인 대각회를 문화공보부에 등록하였고, 문화공보부는 이를 인가하였다. 용성문도회는 초대 이사장, 이사, 감사, 사무국장 등 대각회 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초대 이사장은 당시 대각사 조실이자 경주 분황사 조실인 동헌 조사가 위촉됐고, 초대 이사는 대각사 주지이자 회주인 회암 준휘(檜庵俊輝) 스님, 조계종 종정이자 해인사 용탑선원 조실인 고암 상언(古庵祥彦, 1899-1988) 스님, 양양 낙산사 주지이자 회주인 동암 성수(東庵性洙, 1904-1969) 스님, 해인사 홍제암 조실이자 부산 감로사 조실인 자운 성우(慈雲盛祐, 1911-1992) 스님, 인천 보각선원 조실인 소소 소천(簫韶韶天, 1897-1978) 스님, 해인사 백련암 조실인 퇴옹 성철(退翁性徹, 1912-1993) 스님, 부산 감로사 주지인 서산 보경(西山寶瓊, 1915-1989) 스님, 경주 분황사 한주이자 김해 모은암 주지인 신암 도원(信庵道圓, 1916-2005) 스님, 조계종총무원 총무국장인 금하 광덕(金河光德, 1927-1999) 스님, 부산 범어사 주지인 활산 성수(活山性壽, 1923-2012) 스님이 위촉됐으며, 사무국장은 도문 법사가 위촉됐다. 대각회가 문화공보부에 등록되는 데 당시 이선근 영남대학교 총장의 도움이 컸다. 동헌 조사는 이선근 총장에게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에게 용성 조사의 교시를 실현하는 일이 대한민국의 번창을 도모하는 일임을 알려서 재단법인 대각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이선근 총장도 이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고 흔쾌히 박정희 대통령을 뵈러 서울로 상경했던 것이다. 이선근 총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을 직접 만나서 동헌 조사의 말씀을 전한 뒤 용성 조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하고 대각사상을 선양하는 재단법인 대각회의 설립을 부탁했다. 이 말을 듣고서 박정희 대통령은 곧바로 문화공보부 장관을 불러서 재단법인 대각회의 등록을 받은 뒤 인가를 해주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문화공보부는 대각회의 재단법인 등록 인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각회의 재단법인 등록을 인가해줄 경우 다른 불교계 종단은 물론이고 단체까지도 우후죽순 재단법인 내지는 사단법인 등록 인가를 신청할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 종로 대각사의 대각선원 선덕 소임을 보고 있던 도문 법사는 조계종총무원 총무국장 광덕 스님의 도움을 받아 문화공보부에 재단법인 대각회 설립 인가 서류를 제출하였다. 이에 필요한 모든 경비는 대성자 최사달 회장과 전 문교부 장관 서명원 박사의 아내인 임태순 부회장, 최응봉 변호사의 아내인 대각행 도정순 총무 등이 조달하였다. 1989년 10월경 도문 법사는 용성 조사 창건도량이자 입멸성지인 서울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 제6대 주지로 부임했다. 대각사의 대각선원을 다시 개원한 것도 도문 법사의 업적이다. 1992년 음력 10월 15일 대각사 대각선원의 문호를 다시 열고 용성 조사의 선적(禪的) 가풍(家風)이 드날리길 기원했다. 용성 조사는 대각사를 창건한 뒤 정기적으로 어린이 법회를 열고 어린이 포교에 매진한 것은 물론이고 선원을 개원해 불제자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했다. 용성 조사가 입적한 뒤 언젠가부터 선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었다. 용성 조사가 대각사를 창건한 것은 마음 가는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함인데도 불구하고 대각사가 이러한 창건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긴 도문 법사는 대각선원을 개원함은 물론이고 대각사 어린이회와 대각사 중·고등학생회를 결성해 지도하였던 것이다. 도문 법사의 원력으로 1994년 5월 11일 용성 조사 행적비가 건립됐다. 용성 조사의 행적비를 건립하는 대표는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광덕 스님과 용성문도협의회 회장이자 부산 금정산 범어사 주지인 불국 정관 스님이 맡아 주었고, 비 건립 향도는 가야산 해인사 방장 혜암(慧庵, 1920~2001) 스님이 맡아 주었다. 용성문도회 성우 스님이 용성 조사의 행적비를 건립할 것을 발의하자 이에 뜻을 함께한 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 최사달 초대회장 등 역대 회장과 뜻 있는 회장단, 고문진, 화주진들도 경제적 지원에 앞장섰다. 도문 법사가 행적비에 필요한 6,500만 원을 지원함으로써 행적 건립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용성 조사의 탄생 131주기일이 음력 5월 8일이지만 사부대중의 편의를 위해 불가피하게 일요일인 음력 5월 11일에 용성 조사 행적비 건립 회향법회를 봉행할 수밖에 없었다. 가야산 해인사에서 봉행된 이날 회향법회에는 해인총림 방장 혜암 스님을 비롯해 해인사 대중, 전국의 용성문도 문중 대표, 전국의 인연 있는 5,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해 인산인해를 이뤘다. 용성 조사 행적비는 국내 사찰에 건립된 행적비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총 높이가 8.05m이고, 비문의 총 글자 수는 7,146자이다.
용성 진종 조사 행적비 건립을 위해 영신 방장스님과 대담-중국 소림사에서
용성 조사의 행적비를 건립하는 데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것은 자운 성우 스님이다. 1992년 용성 조사 50주기의 날에 당시 대각사 조실인 성우 스님이 대각사 주지 도문 법사를 따로 부른 뒤, 용성 조사의 수계 득도(得度) 도량인 합천 해인사에 국내에서 가장 큰 용성 조사의 행적비를 건립하는 것을 발원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성우 스님의 발원대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또한 성우 스님이 당부하길, 용성 조사의 법손이 주지 도문 법사이니, 대각사 조실로 주석하라고 지시했다. 이듬해인 1993년 음력 1월 3일 성우 스님이 부산 감로암에서 원적(圓寂)에 들었다. 원적에 들기 하루 전 성우 스님은 인사를 드리러 온 도문 법사에게 용성 조사 행적비를 합천 가야산 해인사 법보도량에 건립하는 노고를 위로한 뒤, 행적비 건립의 정신적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 변함이 없는지 물었다. 변함이 없다고 대답하자 성우 스님은, 무거운 짐만 놓고 간다고 유훈을 남겼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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