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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조사 행적비 건립을 주도하다

불심 도문 법사는 1989년 10월 24일 용성 조사 창건도량이고 입멸성지인 서울 종로 봉익동 대각사의 제6대 주지에 부임하였다. 이듬해(1990년) 음력 2월 24일 용성 조사 제50주기의 날에 대각사 조실 자운 스님은 대각사 주지 도문 법사에게, “용성 조사의 수계 득도 성지인 합천 가야산 해인사 법보도량에 우리나라 절 집안에서 제일 큰 용성 조사 행적비를 건립할 것을 발원하자. 용성 조사 행적비 건립의 정신적인 책임을 져라. 그리고 종단 권력에 맛을 들인 모리배들이 도문 법사를 대각사 조실로 등단하지 못하게 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로 대각사 주지 겸 조실로 등단하라.” 고 당부하였다. 도문 법사는 1990년 용성 조사 탄생지인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를 위시로 하여 토지 8필지 3,628평(11,993㎡), 건물 8동 414평(1,366.75㎡) 총 4,042평(13,359.75㎡)을 매입해 도량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9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백용성 조사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고, 한글학회에서도 백용성 조사에게 감사패를 추서했다.
용성 진종 조사 진영
57세인 1991년 3월 19일부터 3월 22일까지 일본 대마도에 조선국 역관사 순란비 건립제막식에 참석했다. 조선국 역관사 순란이란 조선의 역관사 108인이 일본 관원 4인의 안내를 받아 일본 본토로 들어가다가 대마도에서 풍랑을 만나 모두 순국한 것을 일컫는다. 이 사건을 추념하기 위해 일본대표 10인과 한국대표 10인이 각각 300만원씩 헌금을 하여 조선국 역관사 순란비를 건립하고 그 제막식에 참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막식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일본 대마도에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다. 한국 측 10인 대표 중 황수영 박사와 정영호 박사가 도문 법사께서 진언다라니를 염송해 풍랑을 잠재워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하여 도문 법사는 우리 일행 30여 명 모두 진언다라니를 함께 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일행은 모두 빠짐없이 진언다라니 염송에 동참하겠다고 했다. 일행 30여 명이 각자의 호텔방에서 3시간 가량 진언다라니를 모두 다 함께 염송하였다. 놀랍게도 이튿날 제막식 예정시간이 되자 바람이 자고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밝은 빛을 발하였다. 58세인 1992년 음력 10월 15일에 대각사 대각선원 문호를 다시 열었다. 1987년 대각사 중창불사로 인해 대각선원에서의 참선수행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60세인 1994년 음력 5월 11일에는 용성 조사의 행적비를 건립했다. 용성 조사의 행적비를 건립하는 대표는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금하 광덕(金河光德, 1927-1999) 스님과 용성문도협의회 회장 부산 금정산 범어사 주지 불국 정관 스님이 맡아주었고, 비 건립 향도는 가야산 해인사 방장 혜암(慧庵, 1920-2001) 스님이 맡아주었다. 용성 조사 탄생 제131회의 날은 음력 5월 8일이나, 참례대중의 편의를 위해서 일요일인 음력 5월 11일에 용성 조사 행적비 건립 회향법회를 봉행했던 것이다. 이날 회향법회에는 혜암 스님을 위시로 하여 해인사 산문대중과 용성문도 문중대표와 전국의 인연 있는 5천여 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했다. 도문 법사는 회향법회의 참례대중에게 대각 제175호인 『불타조사원류』 5,000여 권을 보시하였다. 용성 조사 행적비는 국내 사찰에 있는 행적비 중에 가장 커서 위엄이 있다. 비신의 높이 4.3m, 비부의 높이 2.27m, 이수의 높이 1.48m 등 총 높이가 8.05m이고, 비문의 총 글자 수가 7,146자이다. 도문 법사의 생애는 용성 조사의 유업 계승에 바친 생애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69년 9월 11일 용성 조사 유업 계승을 위한 재단법인 대각회를 문화공보부에 등록해 인가받은 것도 도문 법사의 원력과 실천행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9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용성 조사가 선정되자 도문 법사는 다양한 백용성 조사의 선양사업을 전개했다. 우선, 백용성조사유훈실현후원회를 중심으로 기미년 3·1독립운동의 진원지 서울 종로 대각사, 서울 종로 원각사지 탑골공원 등 전국 각지에서 다채로운 찬탄행사를 봉행했고, 백용성조사 탄생지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 유허비를 제막했으며, 백용성 조사의 어록 『각해일륜』 1만여 권을 유포했고,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 대극장에서 ‘아! 백용성 조사’ 음악제를 봉행했던 것이다. 도문 법사는 2000년 국가보훈처 국비와 전라북도 도비와 장수군 군비와 백용성조사 유훈실현후원회의 후원성금으로 탄생지인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에 생가를 복원했다. 생가는 본채 20평, 아래채 10평 등 총30평의 목조와가로 지어졌다. 같은 해 9월 29일 백용성조사 생가복원 낙성회향법회를 1,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봉행하였다. 2001년에는 백용성조사 탄생 제138회의 날에 맞춰 대웅보전 낙성회향법회를 봉행했다. 이듬해(2002년)에는 목조와가 60평인 승방요사 건립불사를 회향했다. 이어서 2003년에는 목조 108평 규모의 용성조사전인 용성교육관을 건립했다. 용성교육관 낙성법회는 그 이듬해(2004년) 음력 8월 29일 봉행됐다. 용성교육관 낙성법회에서는 불타 탄생 성지 네팔 룸비니 국제사원구역 내 한국사원 대성석가사 대웅보전 건립 지원을 위하여 수희동참이 이뤄졌으며, 이날 모인 2억원은 대성석가사 대웅보전 건립 후원금으로 지원하였다.
용성 진종 조사 시조산 제11대 명인비 제막
한편 1998년 2월 9일 용성 조사가 중국 시조산 제11대 명인으로 추존되고, 도문 법사가 중국 시조 제12대 명인으로 추대되었다. 용성 조사는 중국 하남성 신정시 시조산 제11대 명인으로 추인하는 영예증서를 받았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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