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머지않아서 입멸할 것을 예견한 동헌 조사는 87세의 세납에 구례 지리산 화엄사로 주석처를 옮긴 뒤 조실로 있었다. 화엄사로 떠나기 전 동헌 조사는,
“80세에 몸을 바꾸려 했으나, 불심 도문 효상좌의 지극한 간청으로 8년 더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도문 법사에게 폐를 끼칠 수 없으니 내년에는 몸을 바꾸고자 한다. 내가 몸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깊은 상심에 빠지지 말고 용성 조사의 유훈 실현에 매진하라”
고 말했다. 동헌 조사가 화엄사로 주석처를 옮긴 것은 맏상좌인 이산 도광(离山導光, 1922-1984) 스님의 주선 때문이었다. 도광 스님은 음력 6월 14일 은사인 동헌 조사의 탄생 제87회 법회를 극진히 봉행했다.
1983년 음력 8월 4일 동헌 조사는 자신이 예언한 대로 세납 88세, 법랍 61하(夏)를 일기로 원적하였다. 원적에 들기 전 남긴 임종게는 아래와 같다.
八十年前爾是誰 80년 전의 너는 누구이며
八十年後我是誰 80년 후의 나는 누구일까
日落西山月出東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동녘 하늘에 달이 솟는구나
狼山花笑野鳥歌 낭산에 꽃은 빙긋이 웃고 산새는 노래하는구나
도문 법사는 은사인 동헌 조사가 입적하기 두 달 전 동헌 조사로부터 최후의 은밀한 지시를 받았다. 동헌 조사의 제88회 생신 법회가 있는 날이었다. 법회 뒤 동헌 조사는 화엄사 조실로 도문 법사를 부른 뒤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十事目] 국내외 실현 발원 제8회 기원을 하였다. 이 기원을 마치고 동헌 조사는 이번 생에서의 이별을 고하는 삼배를 정중히 올리고 내장산 내장사로 돌아왔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동헌 조사의 다비식이 봉행됐으며, 이날 다비식에는 자운 성우(慈雲盛祐, 1911-1992) 스님, 석주 정일(昔珠正一, 1909-2004) 스님 등 원로대덕 스님을 비롯한 전국의 사부대중 2,000여 명이 운집했다. 도문 법사의 입장에서는 은사이자 법사였으며, 무엇보다도 여름에는 덥지 않은지 겨울에는 춥지 않은지 살펴봐 주시던 자애로운 스승이었다. 다비식이 봉행되는 내내 도문 법사는 은사인 동헌 조사와의 법연을 떠올렸다. 도문 법사가 석가여래부촉법과 석가여래부촉계대법, 조선불교중흥율을 계승한 것은 용성 조사의 예견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동헌 조사가 은사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동헌 조사의 행장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동헌 조사는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으나, 한일합방이 되어서 꿈을 접어야 했다. 동헌 조사가 처음으로 용성 조사를 친견한 곳은 서울 종로 봉익동 대각사였다. 동헌 조사의 백부인 이득영 공은 용성 조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동헌 조사는 백부를 따라서 서울 종로 봉익동 대각사에 갔던 것이다. 당시 이득영 공이 대각사를 방문한 이유는 용성 진종 조사가 민가를 구입한 뒤 수리 개조하여 대각사의 문호를 연 것을 찬탄하기 위해서였다. 대각사 창건은 사은 임동수와 선정심 박정 부부의 후원 공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용성 조사는 이득영 공의 조카인 동헌 조사에게 어떤 주인공이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 말을 듣는 즉시 동헌 조사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데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용성 조사가 청나라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읊었다.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듣는 즉시 동헌 조사는 출가의 원력을 세우게 되었다.
용성 조사로부터 『선문촬요』와 『임제록』을 받은 동헌 조사는 인생행로를 바꾸게 된다. 동헌 조사는 17세부터 22세까지(1912-1917) 6년 동안 용성 조사의 지도에 따라 사미과인 『초발심자경문』, 『사미율의』, 『치문경훈』, 사집과인 『서장』, 『도서』, 『선요』, 『절요』, 사교과인 『수능엄경』, 『대방광원각경』, 『대승기신론』, 『금강경』, 대교과인 『대방광불화엄경』, 『선문염송』, 『경덕전등록』, 이에 더해 『조당집』, 『묘법연화경』, 『대반열반경』 등을 공부했다.
동헌 조사는 1918년 용성 조사를 은사 겸 수법사로 하여 사미 10계를 수지하고 득도하였다. 그 이듬해에 3·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동헌 조사는 용성 조사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고초를 치를 때부터 입멸할 때까지 가까이 지극정성으로 모신 것은 물론이고, 용성 조사의 독립운동과 불교전법 활동에 오른팔 역할을 했다.
특히 동헌 조사는 용성 조사의 지시에 따라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실을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서 알렸다. 일반적으로는 태화관의 기생이 경찰서에 전화를 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생에 앞서 전화를 건 것이 바로 동헌 조사였던 것이다. 용성 조사가 동헌 조사에게 지시한 것은 민족대표들이 방에 들어가면 신발을 숨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 곧바로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서 그 사실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용성 조사는 이미 민족대표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어야만 언론에 크게 보도될 것이고, 그 보도를 본 국민들이 등불처럼 3·1운동에 동참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다. 용성 조사는 태화관의 기생에게도 똑같은 지시를 내렸는데, 이는 혹시 동헌 조사가 은사가 고초를 치를 것을 걱정해 지시를 어길 것을 대비하는 한편 태화관 기생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1939년 2월 23일 세납 77세, 법랍 61세의 일기로 입멸하기 직전 용성 조사가 유언을 내린 것도 동헌 조사와 도문 법사의 아버지인 임철호였다. 용성 조사가 유언으로 남긴 가르침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가르침은 서기 2002년 5월 8일까지 범종을 아침에 33번, 사시에 108번, 저녁에 28번을 타종해 법계에 울려 제불보살님의 증명을 받고 천룡팔부 신중님의 옹호를 받게 하라는 것이었다. 둘째 가르침은 도문 스님에게 정한 날, 정한 장소에서 부처님의 정법안장을 잇게 하라는 것이었다. 셋째 가르침은 자신의 49재를 다 봉행한 뒤 유훈 10사목을 꺼내 본 뒤 최선을 다해 실천하라는 것이었다.
은사가 입멸하자 동헌 조사는 가장 먼저 은사의 사리탑과 추모비를 세우는 데 동분서주해야 했다. 그 노력의 결과 1941년 해인사 용탑선원 남쪽에 사리탑과 추모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이, 전액(篆額)은 오세창이, 글씨는 최종한이 썼다. 비를 세우기 직전 만해 스님은 동헌 조사를 불러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동헌 조사가 용성 조사의 은법제자인 것을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알면 심한 고초를 겪을 것이네. 그러니 비문에는 동헌 조사는 1924년 3월 3일 경남 하동 쌍계사 칠불암에서 춘명 김관성 스님에게 사미십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하세. 그리고 1935년 5월 8일 용성 조사를 법사로 모셨다고 기록하세. 그렇게 쓰면 동헌 조사가 용성 조사를 모신 기간이 겨우 6년 남짓밖에 되지 않으니 형사들의 감시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것이네.”
만해 한용운 스님과 헤어진 뒤 동헌 조사는 금정산 범어사에 주석해 있는 사형인 동산 스님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사형께서도 제가 용성 조사의 은법제자가 아니라 수법제자이고, 모신 것도 고작 6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고 계십시오.”
라고 당부했다.
동헌 조사는 임철호와 도반처럼 지냈던 터라 임철호의 아들인 도문 법사를 상좌로 받았을 때 피붙이처럼 가깝게 여겨졌다. 동헌 조사가 다 이루지 못한 용성 조사의 유훈 10사목은 상좌인 도문 법사가 대를 이어 실현하고 있다.
1945년 12월 12일 해방 후 귀국한 백범 김구는 용성 조사가 입멸한 성지인 대각사를 방문하였다. 백범 김구는 용성 조사의 영정에 참배한 뒤 동헌 조사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용성 큰스님께서 지속적으로 보내주신 독립운동 자금은 나라의 광복을 맞이하는 데 크나큰 힘이 되었습니다. 광복된 조국에서 큰 스님을 뵐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용성 큰스님께서는 매헌 윤봉길 의사를 보내어 자손만대에 순국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습니다. 용성 큰 스님은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셨습니다.”
동헌 조사는 대각사를 대표해 백범 김구 일행을 맞이했을 뿐만 아니라 환영잔치도 성대히 열어주었다.
동헌 완규 조사 부도-승사리9과를 모심
도문 법사는 50세인 1984년 구례 지리산 화엄사 부도전에 동헌 조사 승사리 9과를 모시고 부도를 건립했다. 이듬해(1985년) 음력 6월 14일 동헌 조사 탄생 제90회의 날에 구례 지리산 화엄사 부도전에서 동헌 조사 부도건립 회향법회를 사형 신암 도원 스님을 모시고 사제들과 함께 화엄사 대중을 위시로 하여 인연 있는 사부대중 2백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봉행하였다.
동헌 완규 조사 부도탑 제막-구례 화엄사
· 집필자 : 유응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