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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씨 가문과 용성 진종 조사의 법연(法緣)

불심 도문(佛心道文) 법사의 속명은 임윤화(林允華)이다. 도문 법사는 1935년 음력 3월 21일에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420번지에서 출생했다. 본적은 남원군 운봉면 동천리 503번지이다. 증조부인 사은(士殷) 임동수(林東壽) 거사는 증손자인 윤화가 태어났을 때 아래와 같은 글[出家讚]을 남겼다.
發春花亡國江山 망국의 강산에도 봄꽃이 활짝 피었고 來道人亡家林門 망한 집안 임씨 문중에 도인이 태어났구나. 允執厥中華嚴經 윤집궐중에 대방광불화엄경이니 允華道人來門喜 윤화도인이 이 문중에 와서 너무나 기쁘도다.
도문 법사의 출생을 앞두고 용성 진종(龍城震鍾, 1864-1940) 조사는 임동수 거사에게 “불타조사의 정법안장을 계승할 화광동진의 도승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견한 뒤 윤화라는 속명, 불심이라는 법호, 도문이라는 법명, 염부제향이라는 존호를 손수 지어줬다. 용성 조사가 도문 법사의 출생을 기뻐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불타조사의 정법안장을 계승한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마하 가섭 존자에게 세 곳에서 마음으로 전한 바른 교법을 잇는다는 의미이다. ‘화광동진’이란 부처님이 본색을 감추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속세에 출현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용성 조사는 도문 법사가 석가여래부촉법, 석가여래부촉계대법, 조선불교중흥율을 계승할 운명을 타고났음을 예견했던 것이다.
불심 도문 법사
속명인 윤화에는 ‘윤집궐중화엄경 요의제일사구게 응관십법계성품 전체일체유심조(允執厥中華嚴經了義第一四句偈應觀十法界性品全體一切唯心造)’라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 풀이하면 ‘실로 『대방광불화엄경』의 으뜸 되는 사구게를 그러쥐고 10법계의 성품을 바로 보면 사성육도(四聖六道), 범부중생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윤집궐중’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남긴 말이기도 하다. 윤화라는 이름에는 일관 즉, ‘한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야 한다.’는 뜻도 있다. 도문이라는 법호에는 ‘무량중생 성불인연 발보리심 불도문명(無量衆生成佛因緣發菩提心佛道文明)’이라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 한량없이 중생과 성불인연을 짓고 보리심을 발하여 불도의 문명 세계를 이루라는 의미이다. 불심이라는 법호에는 ‘심상불시 시심즉불 시심작불 시심시불(心想佛是是心卽佛是心作佛是心是佛)’이라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이 곧 부처님이고, 부처님을 닮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곧 부처님이라는 의미이다. 염부제향(閻浮提香)이라는 존호에는 ‘염부제향 즉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閻浮提香卽戒香定香慧香解脫香解脫知見香)’이라는 깊은 뜻이 깃들어 있다. 염부제향이 곧 계향이고, 정향이고, 혜향이고, 해탈향이고, 해탈지견향이라는 의미이다. 오분향(五分香)은 수행자가 성불하겠다는 굳은 원력으로 향을 올리는 것이다. 계향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다짐이고, 정향은 마음을 안정시키는 수행을 하겠다는 다짐이고, 혜향은 참된 지혜를 얻겠다는 다짐이고, 해탈향은 온갖 번뇌에서 해탈하겠다는 다짐이고, 해탈지견향은 스스로 해탈된 존재임을 알겠다는 다짐이다. 염부제향이라는 존호는 『오천오백불명신주제장멸죄경』 중에서 가려 뽑은 이름으로, 많은 사람과 성불 인연을 짓는 염부제향이 되어서 대한민국을 진리의 나라로 만들고 5대양 6대주의 사바예토를 서방정토로 만들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평택 임씨로서 휘는 철호(喆鎬), 법명은 철생(哲生)이다. 철생 임철호 공은 애국심이 투철한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이타행의 삶을 몸소 실천한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다. 특히 임철호 공은 매헌 윤봉길 의사와 함께 용성 조사로부터 삼보귀의 오계를 받고 한평생 중생 제도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매진하였다.
불심 도문 법사 부친 독립운동가 철생 임철호 영가 대전국립현충원 안장식
어머니 성명은 사달(四達), 원불교 법호는 인타원(印陀圓), 원불교 법명은 성자(聖子), 불교 법명은 대성자(大聖子)이다. 원불교의 법호, 법명, 불교 법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도문 법사의 어머니는 지혜롭고 자비로운 성품을 지녔다.
불심 도문 법사 모친 대성자 최사달
스님이 태어나기 전 증조부 증조모 내외분과 조부 조모 내외분, 모친 모두 같은 내용의 태몽을 꾸었다. 그 태몽인즉슨, 하늘에서 오색광명이 퍼지는 연꽃모양의 배가 내려오는데, 배 안에는 동자승이 가사를 입고 팔선녀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고 목청을 드높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배 주변에는 천상세계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그윽한 향기가 가득하였다. 이러한 태몽을 온 가족이 꾸고 난 뒤 어머니가 도문 법사를 잉태했다. 어머니가 잉태하기 전 선친들이 같은 꿈을 꾼 것은 고조부, 고조모 내외 때부터 용성 조사와 법연을 맺어 왔기 때문이다. 고조부와 고조모는 전북 남원의 교룡산성 덕밀암을 찾았다가 용성 조사를 처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당시 용성 조사는 행자 신분이었다. 당시 덕밀암 조실인 혜월 스님은 ‘백 행자가 환성 지안 조사의 후신’이라고 가르쳐줬다. 용성 조사는 고종 원년(1864) 음력 5월 8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하번암면 죽림리(현재 전북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용성 조사는 14세에 덕밀암으로 출가했다. 용성 조사는 부처님께서 불법을 이어받을 것을 계시하는 마정불수기(摩頂佛授記) 꿈을 꾼 뒤 출가하였던 것이다. 이 꿈을 꾼 뒤 용성 조사는 아래와 같은 출가시를 남겼다.
不忘前世事 전생의 일들을 잊지 아니하고 夢中佛授記 꿈속에서 부처님이 수기하셨도다. 出家德密庵 덕밀암으로 출가해서 보니 其佛親夢佛 그 부처님이 꿈속에 뵌 부처님이로다.
이 출가시에서 알 수 있듯 용성 조사는 이미 출가하기도 전에 꿈속에서 덕밀암에 갔고, 덕밀암의 부처님도 친견했던 것이다. 용성 조사가 출가할 당시 덕밀암에는 혜월 화상이 주석하고 계셨다. 혜월 화상은 동학 교주 최제우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인해 덕밀암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최제우와 용천사 조실인 혜월 화상은 덕밀암 은적당에서 선천(先天)의 군주제도를 폐지하고, 후천(後天)의 민주제도를 열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최제우가 순교하자 혜월 화상이 덕밀암에 갇혀 살아야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혜월 화상은 한 달에 한 번씩 남원부사에게 통행증을 발급받아 남원 지리산 실상사의 식량을 보급받는다는 명목으로 운봉의 임상학 공의 집에 가서 식량과 경비도 얻고 나라를 구하고 불교를 포교하는 일에 대하여 토론하였던 것이다. 고조부인 임상학 공은 당시 만석꾼 거부인 박일구의 딸과 결혼해 운봉에 살고 있었다. 임상학 공은 그윽한 향기의 인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임상학 공은 집안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할 줄 알았고, 집 밖에서는 가난한 이웃에게 적선할 줄 알았다. 특히, 자신이 남을 위해 애쓴 일을 생색내거나 자랑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주민들은 그의 선행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보국(輔國) 민영소(閔泳沼)가 그를 지역의 최고 효자로 조정에 보고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1891년, 임상학 공은 전라감사 교지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인 조씨 부인이 “전라감사보다는 운봉 현감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자 민영소 보국대신에게 찾아가 “전라감사가 아닌 운봉 현감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임상학 공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전라감사를 마다하고 아래 지위인 운봉 현감이 되었다. 이는 임상학 공이 공명심이 없고 효심이 깊었던 인물임을 알려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임상학 공은 운봉현감의 교지를 받기 며칠 전 조선의 전국 주요 사찰에 발우를 공양했다. 이 역시 어머니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실상사의 화주승이 절반이나 금이 가서 실로 꿰맨 발우를 들고 있던 것을 보았다. 대사님께서는 어찌하여 깨진 발우를 들고 탁발을 나오셨냐고 어머니가 묻자, 마님 댁의 사랑채 기둥처럼 좋은 나무로 발우를 만들면 깨어질 리 없겠지만 재질이 좋은 나무는 양반들의 차지가 되고 재질이 나쁜 나무로 발우를 만들다 보니 깨지기 일쑤라고 화주승이 대답했다. 화주승의 말을 듣고서 불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병이 나서 눕게 되었다. 어머니의 마음에 든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선뜻 임상학 공은 사랑채 기둥으로 발우를 만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좋은 목재를 사들여 발우를 만들었다. 이는 임상학 공이 어머니의 독실한 신심을 이어받은 불자였음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1894년 임상학 공은 녹두장군 전봉준의 밀사에게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쑥대밭이 될 것이므로 동학의 불길을 잡아 달라는 청을 들었다. 이에 공감한 임상학 공은 의병을 모은 뒤 동학군을 진압하되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당시 임상학 공에게는 조정으로부터 소모관(召募官)에 제수한다는 교지가 내려왔다. 임상학 공의 아들 중에는 백 행자보다 한 살 아래인 임동수가 있었다. 백 행자와 임동수는 만난 순간부터 마음이 통해서 벗이 되었다. 백 행자와 임동수는 실상사에서 이레 동안 함께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평생 동안 용성 조사와 임동수는 인생의 길동무[道伴]로 지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백아와 종자기의 지음(知音) 관계에 비견할 수 있다. 종자기는 백아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백아의 마음을 알아챘듯이, 임동수는 용성 조사가 말하기 전에 이미 용성 조사의 마음을 가장 먼저 알아챘던 것이다. 임동수 공은 진위대(鎭衛隊) 참위(參尉)에 올랐으나, 진위대가 일본이 조선을 침탈하는 데 악용된다는 것을 알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임동수 공은 용성 조사의 활동을 돕고자 북청에서 금광을 경영하기도 했다. 금광을 경영해 얻은 수익금은 거의 대부분 용성 조사가 나라와 불교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에 쓰였다. 임동수 공은 운봉의 만석꾼 박형집의 딸인 박정과 결혼했다. 박형집 첨사는 사위와 딸에게 1만 석씩을 유산으로 줬는데, 임동수 공과 박정 여사는 이 유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하는 데 아까워하지 않았다. 훗날 용성 조사는 박정을 세계불교청소년교육교화후원회 초대회장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도문 법사의 할아버지인 임봉래와 할머니인 박송화도 선대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후원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임봉래와 박송화 사이에서 태어난 임철호는 용성 조사를 스승처럼 모셨다. 용성 조사가 하는 사업마다 곁에서 직·간접적으로 도왔는데, 그 대표적인 사업으로는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백운산의 황무지를 개척해 설립한 화과원, 만주의 용정에 설립한 선농당, 서울에 설립한 대각교당 등을 들 수 있다. 임철호가 용성 조사를 도와서 한 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에 이바지하고, 왜색불교에서 탈피해 청정한 한국불교의 전통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임철호는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청년동맹 운봉지구 활동을 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용성 조사의 제자답게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지혜로운 아들을 낳아 용성 조사의 법맥을 이으라는 지시를 따라서 도문 법사를 낳아서 출가시켰다. 아내인 대성자 최사달은 현모양처로서 세계불교청소년교육교화후원회 4대 회장과 백용성조사 유훈실현후원회 초대회장을 맡아 진력하였다.
· 집필자 : 유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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