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동국대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向上向下自在用 향상구와 향하구의 진리를 자재하게 써야사
天上人間無等匹 천상세계와 인간세계에 짝할 자가 없음이로다.
진제 선사가 2021년 신축년 동안거 결제법어에서 처음으로 내놓은 일성(一聲)이다. 위로 향한다는 뜻의 향상이란 정신의 최고점, 부처님의 절대적이고 지고한 깨달음을 가리킨다. 향상구라는 것은 그 깨달음에서 나온 신령스럽고 오묘한 한마디를 이르는 것이다. 반면 향상과 정반대에 있는 향하란 정신의 최저점이요 제일 낮은 차원의 삶이다. 세속적이고 탐욕스럽고 경박하고 치사한 중생의 삶을 말한다. 요즘의 언어로 따지면 향상구란 형이상학, 향하구란 형이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향상구는 정신세계로의 탐구이고, 향하구는 물질세계로의 탐닉이다.
얼핏 생각하면, 향상구는 선이고 향하구는 악이다. 향상구는 부처님과 모든 보살들이 계시는 거룩하고 경건한 세계다. 이와 달리 세상의 소음이 진동하는 향하구는 항상 멀리하고 내쳐야 할 가치로 보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수행자들은 으레 향상구의 길을 좇는다. 그러나 향상구와 향하구를 동시에 관통해야 한 것이 진제 선사의 올곧은 지론이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라 향상구와 향하구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향상구를 성취하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더욱 열렬하게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함이다. 향하구와 만나지 못하는 향상구는 진정한 향상구가 아니다. 가장 높은 지혜를 성취한 사람만이 가장 낮은 곳까지 자비를 베풀 수 있기 마련이다.
향상구와 향하구를 잇는 연결고리는 진제 선사가 항상 강조하는 참나이다. 진제 선사 사상의 핵심에 자리한 참나를 한 번 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참나는 ‘모든 생멸이 없고 고통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며 ‘영원한 행복과 걸림 없는 대자유와 밝은 지혜와 모두가 평등한 참된 평화가 있는 세계’이다. 좀 더 간추리면, 지고지순하고 완전무결한 세계다. 재물과 권세에 의한 행복은 참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재물이 없어지고 권세가 사라지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위태로운 행복이다. 자유와 지혜와 평등도 마찬가지다. 외부적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억압당할 수 있고 차별받을 수 있다. 지혜 역시 알고 보면 편견이나 고집으로 판명되기 일쑤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재물이든 권세든 지식이든 나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떠도는 것들이다. 언제든 나를 떠날 수 있고 나를 버릴 수 있다.
참나는 바깥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을 바라보는 눈에서 출발한다. 중생은 향하구와 무명(無明)에 마음이 가려져 향상구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 의식이 열리면 육식(六識)이라는 감각기관이 비워져 모든 것의 실상이 분명하게 보이게 된다. 마음의 눈이 열려 마음에 구름이 걷힌다. 재물이나 권세나 지식이 아니라, 본래 나에게 해답이 있고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더 이상 세상의 잡다한 시비에 얽매이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게 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가 위대한 숭고한 부처라는 사실을 통찰한다. 이것이 바로 참나이다.
진제 선사가 세계만방에서 참나의 의미와 간화선의 중요성을 누누이 역설하는 까닭은 개인과 공동체가 지닌 온갖 고통과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진제 선사에 따르면, “동양정신문화의 골수인 간화선은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참나를 깨달아 세계평화를 이룰 수 있는 훌륭한 수행법이다.” 그러므로, “개인 개인이 스스로 참나를 깨달아 마음의 고향에 이르면, 어머니의 품과 같이 온갖 시비 갈등과 시기와 질투가 끊어 없어져서 대안락(大安樂)과 대자유, 그리고 무량한 대지혜를 수용하게 된다.” 또한 참나를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개인 개인을 넘어 사회와 세계가 대안락과 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에 참선의 생활화를 독려하는 진제 선사는, “온 인류가 생활 속에 꾸준히 참선수행을 닦아 행한다면 마음에 모든 분별과 시비 갈등이 사라지게 되어 자연히 마음이 안정될 것이다.”라고 약속한다. 그러면 “죽음에 이르러서도 밝은 마음, 맑은 정신으로 이 몸뚱이를 옷 갈아입듯 벗게 된다.”
참나의 사상적 귀결점은 마지막 구절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참나란 눈에 보이는 나로부터 해탈한 경지이다. 육체와 감각으로서의 자아를 초월한 존재이다. 깊이 고찰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사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의 목숨을 해치고 인간의 존엄성과 마땅히 지켜야 할 윤리를 속절없이 내팽개치는 게 중생이다. 반면 화두정진으로 참나를 알게 되면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단순히 몸뚱이가 아니라 삼라만상과 연결되어 있는 나 자신을 직관하여 ‘만물여야일체’라는 사실을 체득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항상 당당하고 자유롭다. 부처님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통찰을 얻게 되어 부처님과 동일한 권위와 긍지를 지닌다. “참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개인 각각이 삶의 주인공임을 깨닫는 것이다.”라며, “그 주인공은 모든 곳에서 주인공이 되어, 삶의 많은 부분을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수용할 수 있게 된다.”라는 진제 선사의 법문이 이와 상통한다. 그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모든 이념과 사상을 초월하고, 모든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무한히 긍정하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향상구에 이르면 향하구와 통하게 되어 있다. 대자유인의 가슴에는 대자비가 강물처럼 흘러넘친다.
識得拄杖子 이 주장자의 진리를 알 것 같으면
官不容針 관에는 바늘도 용납하지 않음이요,
私通巨馬 사사로이는 거마가 통함이로다.
2020년 경자년 동안거 결제법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게송이다. 당신이 성취한 참나의 정체성을 간명하게 드러낸 대목이다. ‘관불용침’이란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업무를 공정하고 꼼꼼하고 단호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스스로 1,700공안 전부를 철두철미하게 타파한 인물이다. 그만큼 제자를 지도할 때는 그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데까지 매섭게 몰아붙이는 서릿발 같은 성정을 시사한다. 진리에는 에누리가 없다. 반쯤 아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과 같다. 반대로 ‘사통거마’는 사사롭게는 큰 말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넓게 쓴다는 뜻이다. 참나는 나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모조리 털어낸 나이고, 우주 전체와 소통하고 어울릴 수 있는 나이다. 숱한 관문을 넘고 ‘문 없는 문’까지 뚫은 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마음살림이다. 진제 선사는 오늘도 이 같은 대자유와 대자비의 극치를 대중에게 말씀으로 행동으로 선보이고 있다.
· 집필자 : 장영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