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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에 나타난 진제 선사의 사상

2006년 병술년 동화사 동안거 결제 법어
게송은 깨달음의 노래다. 견성한 도인들이 자신의 경지를 시로 풀어낸 것이다. 도를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오도송(悟道頌)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역대 조사들은 한시 형식의 수많은 게송을 남겼다. 중국으로 건너온 부처님 심인법을 계승한 진제 선사 또한 법어마다 게송을 넣어 당신의 선풍(禪風)을 드러내 왔다. 특히 선사들의 게송은 은유와 함축을 특성으로 하는 시의 형식을 차용했기에 그 내용이 매우 신비하고 내밀하다. 법어의 초입이나 말미에 배치되는 진제 선사의 게송은 스스로 깨달은 조사선의 핵심을 미리 제시하거나 요약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도력의 수승한 경계를 보여주는 데다 대장부로서의 기백이 넘쳐 사상성과 문학성 측면 모두에서 귀하게 평가된다.
不起纖毫修學心 털끝만큼이라도 닦아 배울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無相光中常自在 상이 없는 빛 가운데 항상 자재함이라. 無限落花隨流去 무한한 낙화는 흐름을 따라가고 夕陽春色滿江湖 해 저문 봄빛이 강호에 가득하도다. 一曲兩曲無人會 진리의 곡조를 한 곡 두 곡 읊어야 아는 이 없고 無限雲山碧層層 한없는 구름산만 겹겹이 푸르도다.
음력 2021년 10월15일부터 2022년 1월15일까지 이어진 동안거에 있었던 진제 선사의 법어에서 발췌했다. 전자는 법어의 서두에 보인 게송이며 후자는 법어를 마무리하면서 새긴 구절이다. 법어는 일반적으로 4줄짜리 4언 절구 한시의 틀을 갖춘 게송으로 시작해 2줄짜리 게송으로 끝맺는다. 선가 고유의 상당법어(上堂法語, 법좌에 올라 내리는 법어) 형식이다. 진제 선사는 처음의 게송을 통해 자신이 깨우친 진리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이후 화두의 소재가 되는 역대 조사들의 예화를 소개한 뒤에, 왜 우리가 화두를 들고 치열하게 정진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마지막 게송은 진리의 심오한 법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향한 경책의 성격을 띤다. 말투는 차갑지만 결국은 더욱 신실한 정진을 독려한다는 취지다. 예시로 든 게송들을 살펴보면, 처음의 게송은 도인의 넉넉하고 웅숭깊은 마음 살림을 시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닦아 배울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이란 일체 분별을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다. 피상적인 개념이나 지식으로는 절대 근본 이치를 체득할 수 없다. ‘상(相)이 없는 빛 가운데 항상 자재(自在)함’이라는 구절도 이와 상통한다. 상이란 쉽게 말하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다. 그리고 겉모습이 진실은 아니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 상에 유혹당하지 않고 상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무한한 낙화(落花)’와 같이 오직 ‘흐름을 따라가고’ 우주의 원리에 순응하며 자연의 순환을 관조한다. 자아에 대한 고집과 애착이 없으니 자아로부터 자유롭고, 궁극적으로 일체 만물을 자기 자신과 같이 자신과 동일하게 아낀다. 온갖 화두를 모조리 타파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경이롭고 무량한 결실이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해 저문 봄빛’만이 내면에 가득하다. 결국 이것이 진제 선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참나의 실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부모로부터 이 몸을 받아서 지금 이렇게 ‘나다’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백 년 이내에 썩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므로 진정한 ‘참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에게 태어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인가?’ 이것을 일러 ‘화두(話頭)’라고 합니다. 이 화두를 챙기고 의심하기를 끊어짐 없도록 노력하다 보면, 문득 참의심이 시동 걸리게 됩니다. 참의심이 시동 걸리면 그때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되 보는 것도 잊어버리고, 듣되 듣는 것도 잊어버리고, 몸뚱이도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화두의심 한 생각으로 삼매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며칠이고 몇 달이고 화두의심에 푸욱 빠져서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게 됩니다. 그러면 완전한 ‘참나’를 찾게 되고 마음의 고향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제 선사가 가르치는 ‘마음의 고향’이란 게송에서 묘사된 그곳이다. 본질적으로 욕심에 헐떡일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나(우리)로서는 희망이 없다. 반목과 편견에 따른 번뇌의 진탕을 굴러야 한다. 반면 화두를 깨쳐 견성하면 영원히 평화롭고 그윽한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 일념삼매에 들어 부동일념(不動一念)한 결과로 단박에 이르게 되는, 더 이상 오를 데 없는 무상정각(無上正覺)의 깨달음을 유려한 시가에 담아내고 있다. 해마다 진제 선사의 안거 법어 형태는 대동소이하다. 물론 그만큼 내용도 일관되고 간곡하다.
태평세월에 업을 다스리는 데는 상(相)이 없음이요, 들 늙은이들의 가풍은 지극히 순함이라. 다못 촌에서 노래하고 모여서 마시는지라, 이에 순임금의 덕과 요임금의 어짊을 어찌 알리요.
위 시는 2020년 경자년 동안거 결제법어의 게송이다. 마음의 고향은 중국 요순시대의 태평성대에 비견된다. 지극히 순박하여 서로가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화합의 마음이다.
눈 가운데 티끌 없으니 긁으려 하지 말고 거울 가운데 먼지 없으니 닦으려 하지 말라. 발을 디뎌 문을 나가 큰 길을 행함에 주장자를 횡으로 메고 산(山) 노래를 부름이로다.
위에 인용한 2019년 기해년 동안거 결제법어에서는 일체 분별을 초월한 도인의 넉넉한 대자유가 펼쳐진다. 단언컨대 이는 단순히 현란한 말장난이 아니다. 모든 화두를 막힘없이 투과하면 실제로 맛볼 수 있는 체험이다. 곧 넉넉한 대자유든 요순시대의 평온이든, 진정하고 영원한 행복을 꿈꾸는 수행자라면 반드시 화두를 뚫어야만 한다. 진제 선사가 “진리의 곡조를 한 곡 두 곡 읊어야 아는 이 없고.”(「2022년 동안거 법어」)라며 탄식하거나, “눈먼 사람들이 서로 만나 웃는 곳에 울타리를 붙잡고 담장이라 하니 가히 불쌍하구나.”라며, 혀를 차는 이유다. 게송, 진제 선사가 짓는 깨달음의 노래들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발심과 정진을 요구하고 있다.
· 집필자 : 장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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