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모든 종교 가운데 오직 불교만이 상향식(上向式)의 종교다. 위에서 내려오는 종교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밀고 올라가는 종교다. 다들 신(神)으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불교만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수행이 먼저임을 강조한다. 나의 삶은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생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나다. 나의 뜻과 힘으로 이어나가는 정진만이 삶의 해법이다.
진제 선사는 책을 통해서도 법을 펼쳤다, 『참선이란 무엇인가(마음의 고향에 이르는 길)』, 『마음을 열어 빛을 보다(간화선 법어집)』, 『Open The Mind, See The Light(간화선 영문 법어집)』, 『석인은 물을 긷고 목녀는 꽃을 따네』 등의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Open The Mind, See The Light
선사는 저서들에서 간화선 그리고 간화선의 모태가 되는 조사선에 관해 설명하면서 깨달음의 ‘단계론’을 설파한다. 진리에도 여러 단계가 있으니, “삼라만상이 그대로 청정한 진리, 삼라만상이 공하여 티끌 하나 없는 진리, 모든 부처님이 바로 깨달은 향상(向上)의 일구(一句)가 있다.”라는 가르침이다. 진제 선사의 법문에 따르면 ‘향상의 일구’에 도달해 그것마저 타파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정진하는 것이 수행자의 길이다. 조사선의 근본정신 가운데 하나인 초불(超佛)의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화선과 조사선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자 최상승의 법이라는 것이 선사의 확신이다.
“부처님의 정법정안을 이은 육조(六祖)의 정맥은 '몰록 깨달을 것 같으면 몰록 다 닦는다'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법입니다. 최상승의 향상구가 열리면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없는 돈오돈수라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입니다.”
조사선의 형식적 특징은 돈오(頓悟)이며, 이는 돈수(頓修)와 연결된다. ‘몰록 깨달을 것 같으면 몰록 다 닦는다.’라는 진제 선사의 법문처럼, 한꺼번에 완전히 깨달으면, 더 이상 수행해야 할 필요가 없다. 만약 더 닦아야 할 것이 남아있다면, 불완전한 깨달음이거나 거짓말이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곧 한 번에 완벽하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정착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돈수’의 의미를 곡해해서 수행이 원래 무용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모든 생명이 본래 부처라면, 수행을 하든 안 하든 다 같이 부처인 것이 아니냐고 따지며 나태하고 방일하게 산다. 실제로 조사선이 확산된 당나라에서는 허무주의 계열의 ‘무사선(無事禪)’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출발한 것이 바로 송나라 대혜 종고 선사의 간화선이다. 돈수는 반드시 돈오를 전제해야만 진정성을 얻을 수 있다. 돈오를 해야만 돈수가 가능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돈오돈수’란 수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돈오에 이를 데까지는 피눈물이 나도록 수행해야 한다는 역설적 비유라고 말할 수 있다. 향상구를 이룬 때라야만 비로소 공부를 놓아도 된다.
향상일구(向上一句), 더 이상 오를 데 없는 최후의 한 마디에 이르기 위해 참선수행자들은 목숨을 건다. 한편 최상승의 법이 있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법도 있을 것이다. 끝내 향상구에 도달한 진제 대선사는 향상구에 이르기 전에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단계들을 소개하면서도 절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고 경책한다.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비법(非法)이기 때문이다. “향상구 밑에 여래선(如來禪)이 있고 법신변사(法身邊事)가 있어서, 우리가 공부를 하여 그러한 경계에 소견(所見)이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스승 없이 공부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법신변사를 알았다고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착각하여 구경법(究竟法)으로 삼는 이가 있습니다.”
예컨대 화두를 참구하는 중에 불현듯 부처님이나 보살의 모습이 나타나는 수 있다. 이럴 때 이 환상에 천착하고 도취되면 이른바 법신변사에 떨어지게 된다. 이는 병통일 뿐 공부가 아니다. 물론 법신변사의 경지도 쉬 오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진제 선사는 “삼천대천세계 형형색색이 한 티끌도 없이 청정한 경지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보다 상위인 여래선의 경지는 법신변사와 같이 삼천대천세계가 텅텅 비고 빈 데다가, 성인과 범부가 없고, 하늘세계와 지옥도 없는 무일물(無一物)의 경지이다. 그러면서도 진제 선사는 “법신변사의 진리와 여래선의 진리는 대오견성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오직 향상일구를 투과해야만 모든 부처님의 살림살이가 내 살림살이가 되어 제불제조(諸佛諸祖)를 점검하고 지도하여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화가 있다. 향엄 지한(香嚴智閑, ?-898) 선사가 어느 날 “지난해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 가난이 진짜 가난이네. 작년엔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더니, 금년엔 아예 송곳조차 없네.”라고 게송을 읊었다. 이에 그의 사형(師兄)이었던 앙산 혜적(仰山慧寂, 807-883) 선사는 여래선은 얻었지만 아직 조사선은 얻지 못했다며 핀잔을 주었다. 여래선의 특징이자 한계인 ‘점수(漸修)’를 꼬집은 것이다. 향엄 선사의 게송에서 송곳은 번뇌를 비유한 것이고 반어법의 표현으로, 번뇌가 완전히 사라졌음에 뿌듯해하고 있는 내용이다. 앙산 선사의 지적은 이 대목을 겨눈 것이다. 향엄이 ‘깨달았다’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상(相)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래선이 세상이 공하다는 통찰에 만족하는 것이라면, 조사선은 한 걸음 나아가 이런 공이라는 사실조차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경지이다. 대상세계가 비어있는 법공(法空)인 동시에 나조차도 비어있는 아공(我空)인 상태에서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사는 일이라 정리할 수 있다.
향상구를 얻는 일은 정녕 녹록하지 않다. 목숨을 걸어도 희박하다. 하지만 거기에만 삶의 궁극적인 해법이 있다. 진제 선사는 “법신변사나 여래선으로는 향상의 진리의 법을 설해놓은 것에는 도저히 앙망불급(仰望不及)이다.”라면서, “다시 또 향상의 진리를 깨쳐야만 구경법에 이른다.”라고 역설했다. 역대 조사들이 두 번 세 번 깨달았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선사 역시 이전엔 몇 번을 개오(開悟)하였으나 향곡 선사가 제시한 ‘일면불 월면불’ 화두를 투과함으로써 마침내 1,700공안(公案)을 막힘없이 뚫어낼 수 있었다.
· 집필자 : 장영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