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0년 불교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조사선은 몇 가지 특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불(卽佛)·돈오(頓悟)·무수(無修)·초불(超佛)의 키워드로 정리된다. ‘즉불(卽佛)’이란 조사선이 지닌 사상의 본질이다. 이 세상 그대로 완전무결한 세계이며, 그리고 중생 모두가 본래 부처라고 하는 절대 긍정이다. 부처를 따로 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그만이다. 불성(佛性)은 항상 여여(如如)하나 다만 자기(自己)라는 망념(妄念) 탓으로 인해 그 사실을 보지 못하거나 착각할 뿐이다. “중생들은 무명(無明)에 의해 ‘나’라는 생각과 집착과 분별로 본 성품이 가려져 있어서 가르침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 진제 선사의 설명이다.
일례로 서산 휴정 선사는 저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신의 본성만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구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바르지 못한 것이다.[不用捨衆生心 但莫汚自性 求正法是邪]”라고 지적했다. 중생이 곧 부처이고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이 조사선이다. 진제 선사는 이를 ‘참나’라는 개념으로 푼다. “참나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개인 각각이 삶의 주인공임을 깨닫는 것이다.”라며, “그 주인공은 모든 곳에서 주인공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수용하며 살아갈 수 있다.”라고 확언했다.
즉불이 깨달음의 본질이라면 돈오(頓悟)는 깨달음의 형식이다. 깨달음은 순차적이거나 점진적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으레 ‘몰록’ 깨닫는다는 표현을 쓴다. 어느 날 갑자기 문득 퍼뜩 대오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는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고, 천녕 범기(天寧梵琦, 1296-1370) 선사는 성루에서 들리는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고봉 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는 목침이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고, 서산 휴정 선사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진제 선사의 법 스승인 향곡 선사는 돌풍이 문짝을 때리는 소리에, 진제 선사 본인은 하얀 눈이 마당에 놓인 대야에서 사그라지는 것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또한 돈오는 순간적이면서도 전체적인 깨달음이다. 부분적이지 않고 완전하게, 철저하고 새어나감이 없이, 진리와 자성(自性)을 ‘통째로’ 파악하는 것이다. 갑자기 깨닫는다고 해서 우연히 깨닫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화두정진의 힘이 쌓이고 쌓인 결실이다. 진제 선사는 “견성할 때까지 바위처럼 움직이지 말고 뼛골에 사무치는 화두 의정(疑情)으로 정진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돈오란 간화선의 에너지가 임계점에 도달해 마침내 깨달음이 폭발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무수(無修)’는 조사선의 수행론이다. 엄밀히 말하면, ‘무수지수(無修之修)’는 ‘수행이라는 관념에 집착하지 않는 수행’을 의미한다. 수행이란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자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진제 선사는 역대 조사들 가운데서도 특히 마조 도일 선사를 위대한 선지식으로 꼽는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후로 가장 위대한 도인이라면 마조 도일(馬祖道一) 선사를 꼽을 수 있다며, “그분의 탁월한 안목은 감히 어느 누구도 능가할 사람이 없다.”라고 극찬했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이다.”라는 법문으로 유명한 마조 선사는 무수지수의 본보기를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좌선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마조 앞으로 스승인 남악 회양 선사가 다가갔다. 정진하는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는 갑자기 벽돌 하나를 가져와 열심히 갈기 시작했다.
“스님,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고자 하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할진대,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든 마조가 재차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를 수레에 매서 수레가 가지 않을 때 수레를 쳐야 옳겠는가, 소를 때려야 옳겠는가?”
젊은 마조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자 회양 선사가 다시 말씀을 이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는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선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앉은 부처를 배운다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느 하나의 법이 아니니 자네가 부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이네.”
조사선은 머무름이 없는 ‘무주법(無住法)’이어서 취하거나 버리는 분별이 없어야 한다. 앉아있는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를 그럴듯하게 흉내내는 것에 불과하다. 앉아있기만 한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라는 상에 갇히는 것이다. 진제 선사는, 여기서 크게 뉘우친 마조 선사는 좌선만을 고집하던 생각을 버리고,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 24시간 일여(一如)하게 화두를 참구했고 순일을 이루어서 마침내 크게 깨쳤다고 설명했다. 선사가 일상생활 속에서 꾸준히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당부의 이유가 내포된 이야기이다. “부처를 완전한 경지로 여기지 말라. 나에게는 그것이 마치 뒷간의 변기와 같다.[莫將佛爲究竟 我見猶如厠孔]”(『임제록(臨濟錄)』)
행주좌와 어묵동정
마지막으로 부처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초불(超佛)의 정신은 진제 선사가 계승한 임제선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임제 의현 선사는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남겼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대단히 불경하고 잔혹하게 들리지만, 스스로 무한히 향상하고 갱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주문이다.
선의 본원은 궁극적으로 초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생의 자아를 초월해 성불 곧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번뇌로 가득한 자아를 초월해 참나를 성취하는 것이다. 윤회하는 자아를 초월해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다. 형식과 통념도 초월해야 한다. 서방정토(西方淨土)란 서쪽 어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의 자성(自性)에 있다. 재가가 곧 출가이며 법당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나 수행할 수 있다. 각자가 살고 있는 생활의 터전이 수행처이다. 깨달음의 근원은 부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 집필자 : 장영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