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28대 진덕여왕 4년(650) 법랑(法朗) 선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 선종 제4조 도신(道信) 선사의 법을 전해온 것을 시초로 본다. 200여 년이 흘러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한다.
구산선문이란 나말여초(羅末麗初) 시기에 선승(禪僧)들이 세운 아홉 곳의 참선근본도량을 가리킨다. 즉 가지산문(전남 장흥), 수미산문(황해 해주), 사굴산문(강원 강릉), 사자산문(강원 영월), 성주산문(충남 보령), 희양산문(경북 문경), 동리산문(전남 곡성), 실상산문(전북 남원), 봉림산문(경남 창원)이다. 선문이 차려진 위치들을 살펴보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지역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구산선문을 개창한 선승들은 대부분 국토의 오지를 본거지로 삼았다. 아울러 신라 하대 왕권 해체기에 대두된 지방호족세력들의 후원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화엄종과 밀교 계열의 귀족적이고 현학적인 교학불교를 비판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자주적이고 즉각적인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법(禪法)을 펼치면서, 대다수 글자를 모르던 일반 백성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구산선문의 주역들 가운데 첫손을 꼽는다면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도의국사(道義國師, ?-825)이다. 스님은 홍주 개원사로 유학해 중국 조사선의 중흥조인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아래에서 공부했다. 특출한 지혜와 정진력으로 인해 서당 지장으로부터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그대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 법을 전하랴.”하는 진심어린 찬사를 받았다. 본토가 아닌 변방 타국의 승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정한 것이니, 그 지견(智見)과 됨됨이를 능히 집작할 수 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에 선불교도 지속적으로 번창했다. 반면 군왕과 제도권의 비호를 받다보니 선승 특유의 주체성과 결기는 빛을 잃었다. 타락의 위기에 놓인 선문을 되살린 인물이 바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다. 보조 지눌은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통해 선불교의 쇄신에 나섰다. 세속의 명리를 초월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가풍을 복원했다. 이와 더불어 실천적 선정과 학문적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함께, 깨달은 뒤에도 수행을 이어가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 이론으로 한국 선종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도의국사가 조계종의 종조라면 태고 보우 국사는 제2의 중흥을 이끌었다.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현대 한국 선종 법맥의 원류에 위치하는 조사(祖師)이다. 그는 임제선(臨濟禪)의 사상과 법통을 수용해 재도약시켰다. 고려시대 접어들어 분열과 갈등 양상을 보이던 구산선문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또한 중국 임제종의 종풍을 계승함으로써 오늘날 종단의 사상적 정체성을 정립했다.
한국 최대의 공안집(公案集)인 『선문염송(禪門拈頌)』(전30권)을 편찬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도 고려시대 선불교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문염송』은 선의 핵심적인 요강을 설명한 교리서이다. 동시에 당시 국가 차원에서 거행됐던 담선(談禪) 법회에서 제창됐던 역대 공안(公案: 검증된 화두)들을 집대성한 역작이다. 한국의 선종도 중국의 그것 못지않은 사상적 체계를 갖추게 된 셈이다. 『선문염송』은 우리나라 선불교의 위대한 유산이다. 중국의 선종에 전혀 뒤지지 않는 한국 선승들의 역량을 드러내며 정체성을 수립했다. 이밖에도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지은 백운 경한(白雲景閑, 1299-1374) 스님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도 선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했다.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는 탄압과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이때 불교를 나락에서 건진 스님이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선사이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진 청허 휴정은 억불 정책으로 괴멸하다시피 한 한국불교의 종통(宗統)을 복원했다. 오늘날 조계종 스님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거의 모든 스님들이 청허휴정 선사를 조상(祖上)으로 만난다. 동시에 선(禪)의 종지(宗旨)를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 천명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지금껏 선불교에서 고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는 이른바 왜색불교에 의해 오염됐다. 그러나 선각자들의 활약으로 한국불교의 명맥은 저항 속에서 꿋꿋이 유지됐으며 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는 현대 한국 선의 중흥조로 불린다. 투철한 정진과 독특한 기백으로 패배의식과 매너리즘에 빠진 선가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경허 선사의 법맥(法脈)은 혜월 혜명(慧月慧明, 1862-1937) 선사로 이어지는데, 혜월 선사는 남방의 도인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서 대중에게 깨달음의 향기를 전했다. 24세 되던 해에 경허 스님을 만나 진정한 정진에 돌입했다. 스승으로부터 ‘화두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 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화두를 참구하다가 비로소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스승에게 드릴 짚신을 삼기 위해 ‘탁’하고 두드리는 망치 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운봉 성수(雲峰性粹, 1889-1946) 선사는 혜월 스님의 법을 계승했다. 금강산 오대산 묘향산 지리산 백암산 등 명산에서 두루 정진했다. 밤을 낮 삼아 참선에 몰입하고 공양시간도 잊은 채 오매불망 화두를 들었다. 마침내 1923년 12월 15일 새벽녘, 전라남도 장성 백암산 운문암에서 모든 의심이 사라지는 경계를 체험했다. 삶의 지혜가 풍부하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별명이 ‘조리운봉(調理雲峰)’이었다. 참선 공부를 하는 이판(理判)뿐만 아니라 사찰 행정을 맡아보는 사판(事判)에도 밝았다.
운봉 선사의 제자 향곡 혜림(香谷蕙林, 1912~1978) 선사는 조계종 전 종정 성철 스님과 절친한 도반이었으며 진제 선사에게 법을 전한 스님이다. 젊은 수좌들이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며 일으킨 1947년 봉암사 결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이며, 선암사, 불국사, 동화사, 선학원 등에서 조실로서 제자들을 지도했다. 1950년대 한국불교 정통성 회복을 위한 불교정화운동도 이끌었다. 스승인 운봉 선사와의 법거량은 기백이 넘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승이 들이민 목침을 냅다 발로 차버리며, “천 마디 만 마디가 모두 꿈속의 꿈을 설한 것이니, 모든 불조(佛祖)가 나를 속인 것이다.”라며 사자후를 날렸다. 이처럼 기라성같은 선사들로부터 한국 선불교의 모든 기품과 역량을 물려받은 인물이 바로 진제 법원(眞際法遠, 1934-) 선사이다.
경허 선사(좌상) – 혜월 선사(우상)
운봉 선사(좌하) – 향곡 선사(우하)
· 집필자 : 장영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