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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세계화의 서막, 무차선대법회

무차선회는 선불교를 주제로 한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바른 법을 세우는 공론의 장이다. 예컨대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의 모델인 중국 당나라의 고승 현장(玄奘) 법사가 종파 간의 논쟁을 불식하기 위해 무차선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각종 선서(禪書)에도 무차법회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존재한다. 육조 혜능(慧能) 선사의 제자였던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 역시 스승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공표하기 위해 무차선회를 열었고 이는 선종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우리나라에선 1912년 방한암(方漢岩) 선사가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서 무차선회를 개최했는데, 이를 시초로 본다. 부처님의 위대한 심인법이 담긴 무차선회는 정확히 90년 뒤에 부산에서 다시 열린다. 한일월드컵으로 떠들썩했던 2002년 그해 가을이다. 10월 20일 부산 해운정사에서 무차선대회가 봉행되었다. 무려 5,000여 명이 참석해 축구경기장만큼이나 성황을 이뤘다. 특히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고승과 불교 관계자를 대거 초청한 국제대회라는 점에서는 한국불교 최초였다. 대구 동화사 조실이자 해운정사 조실인 한국 진제 선사를 좌장으로 중국의 정혜(淨慧) 선사(조주원 백림사(柏林寺) 방장, 1933-2013), 일본의 종현(宗玄) 선사(임제종 묘심사파(妙心寺派) 대표이자 대보리사 관장)가 법사로 참석해 법문을 내리고 법거량을 펼쳤다. 대회는 동화사 및 해운정사와 함께 한국 선승의 요람인 전국선원수좌회와 전국비구니선문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대회의 주체와 규모, 내실을 모두 완벽하게 갖춘 셈이다. 무차선대법회의 주제는 ‘부처님 심인법(心印法) 선양(宣揚)과 참사람의 인간성 회복으로 세계평화 및 남북평화통일 성취’였다. 인류의 행복과 번영은 본질적으로 ‘참나’의 발견에 있다는 진제 선사의 지론이 고스란히 반영된 제목이다. 진제 선사는 인사말을 통해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급격한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의 참된 본래면목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혼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며 “이러한 때에 오묘한 선(禪)의 진리를 알고 행하여 나간다면,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여 참다운 자기 모습을 찾아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법좌에 올라 자신의 말을 입증해 보였다. 국내외 큰스님과 유력 정관계 인사들을 비롯한 5,000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법을 설(說)하고 선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점을 단박에 일깨워주었다. 무엇보다 무차선회의 최대 성과는 한국 선불교에서 첫손으로 꼽히는 종장인 진제 선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능란한 기봉(機鋒)으로 외국의 고승들을 제압하며 한국불교가 왜 간화선의 종주국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분별의 경계에 전혀 걸리지 않았고 때로는 거침없는 사자후로, 때로는 재치와 해학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깨달음을 기반으로 한 선사의 현묘한 언설을 통해 참석자들은 최상승의 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었다. 무차선회는 근래 보기 드문 법석이었다. 깨달음의 깊이를 점검하는 독특한 방식인 ‘법거량’이 공개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진제 선사의 말씀대로 법거량은 선불교의 본거지인 중국에서도 사라졌다. 이제는 한국의 선방에서만 간혹 볼 수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한국불교의 위대함을 만방에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의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선사가 희유한 기회를 직접 만들어 펼쳐 보인 것이다. 이날 법회의 백미는 단연 한국 측 법사인 진제 선사와 대중들 간에 벌어진 법거량이다. 선사의 법문이 끝나갈 무렵 행사장 앞줄에서 서성이던 한 외국인 스님이 갑자기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벽안(碧眼)의 납자는 갑자기 손으로 탁자를 치며 마이크를 치웠다. 돌발행동에도 진제 선사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여우같은 놈이로구나.”라며 가볍게 받아쳤다. 미묘법을 알지 못하는 관객들만이 당황하고 긴장했다. 선사는 태연하게 법문을 이어갔다. “향상의 진리와 향하의 진리를 마음대로 쓰니[向上向下自在用], 하늘세계와 인간세계에 짝할 자 없음이로다[天上人間無等匹].”라는 게송을 끝으로 법문은 마무리됐다. ‘향상의 진리’란 가장 최상의 진리, 즉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일컫는다. 선가에서는 히말라야 산꼭대기 에베레스트에 이르면 그 아래 모든 산을 다 볼 수 있는 상태에 곧잘 비유한다. 즉 ‘최고의 진리’에 이르면 다른 모든 진리까지 통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향상의 진리에 이르렀으니 당연히 수준 낮은 향하의 진리는 말할 것도 없이 달통한다. 어디에 처해있든 자유롭고 행복하다. 역경(逆境)에서든 순경(順境)에서든, 신세가 훤해지든 궁하든, 강자든 약자든 평등하게 대하며 부처로서의 고귀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법문 이후 본격적인 법거량이 시작됐다. 단순히 법문 내용과 관련한 그저 그런 질의응답이 아니다. 각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격식도 갖추지 않는다. 상하가 없고 승속을 차별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날것의 모습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겨룬다. 어느 스님이 진제 선사 앞으로 나와 정중히 삼배를 하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반말로 물었다.
“진제 큰스님, 오늘 이 대법회가 무슨 법회요.” “허물이 만천하에 가득합니다.” “그르쳤다. 나와 차나 한 잔 하자. 내려와.” “억!” “내려와!” “억!”
진제 선사는 ‘지식의 한량없는 자비와 원력이 담긴 최상의 불교법회’라고 무차선회를 스스로 평가했다. 객관적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갑자기 “허물만이 가득한 법회”라며 말을 바꿨다. 물론 역설의 표현이다. 불립문자를 강조하는 선불교에서는 예로부터 ‘개구즉착(開口卽錯)’이라 하여, 입을 여는 순간 이미 틀렸다는 격언이 있다. ‘최상의 불교법회’라는 상에 집착해 고정관념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따로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허물에 빗대어 버릇없이 대드는 객승을 꾸짖는 것일 수도 있다. 해석에는 경계가 없다. 또 다른 스님이 나섰다.
“어떠한 것이 향상의 진리입니까?” “만 리에 백골이 즐비함이로다.” “어떠한 것이 향하의 진리입니까?” “대지의 산과 물이로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향상이라고 하면 으레 사람들은 ‘향상’이라는 개념에 어울릴 그럴듯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깨끗하고 성스럽고 아름답고 등등. 그리고 깨끗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운 것만이 향상이라며 더럽고 속물스럽고 추한 것들을 피하고 욕한다. 하지만 진제 선사는 향상이란 사방에 널린 시체들처럼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이라며 그런 통념을 부숴버린다. 향하의 진리 또한 별것 아니라고 보면 안 된다. ‘대지의 산과 물’이라는 진제 선사의 대답은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을 겨눈다. 알고 보면, 우리의 삶을 삶답게 만드는 것은 밥과 똥이다. 젊은 스님이 단상에 올랐다.
“스님께서 지금까지 하시는 그 말씀의 소리는 지금 어디에 담았습니까?” “한마디도 담은 바가 없소.” “그 소리가 어디서 오고 있습니까?” “온 데가 없는데 간 데가 있겠습니까?” “지금 오고 있는 그 소리는 어디에서 오고 있습니까?” “억!” “시간 세월이 무량광변하고 흔적도 없으며 소리는 만들어 쓰는 사람마다 달리 씁니다. 본 소리를 말해 주십시오.” 이에 선사는 주장자를 내려쳤다.
이에 선사는 주장자를 내려쳤다. 법거량의 참맛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단어나 자구에 매달리면 그 참뜻을 알 수 없다. 언어는 겉핥기에 불과하며 분별만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제 선사의 대답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당함과 여유로움이다. 어떤 대답이든 생각하지 않고 바로 말한다. 움찔하거나 주저하는 등 마음의 동요도 전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형식과 관념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오직 대오한 선지식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2002년 부산 해운정사 무차선대법회는 선사의 선풍이 얼마나 독보적인지 유감없이 보여준 자리였다. 무차선회를 기점으로 선사의 명성은 세계를 향해 뻗어나간다.
· 집필자 : 장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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