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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중요성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아기 새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아기 새와 어미 새가 함께 알을 쫀다는 뜻이다. 선불교에서도 쓰이는 말인데, 스승의 절대적 중요성을 시사한다. 제자는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만 바르고 온전하게 깨달음을 줄 수 있다. 혼자서 깨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선사들에겐 새빨간 거짓말이다. 깨달음의 전등(傳燈)이 일어나려면, 상식적으로 등불을 건네주는 사람이 꼭 있어야 한다. 진제 선사 역시 향곡 선사의 지도 아래 도를 이뤘다. 선가(禪家)의 전통은 철저한 사자상승(師資相承)이다. 반드시 스승에게 화두를 받고, 수행의 진척 정도를 스승에게 점검을 받고, 깨달은 바를 스승에게 인가(印可) 받아야 한다.
경허 선사 / 혜월 선사 / 운봉 선사 / 향곡 선사
진제 선사는 “간화선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 밝은 선지식의 올바른 지도를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혼자서 깨닫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길도 모르고 차(車)조차 없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무작정 가겠다는 격이다. 선사는 “광대무변한 허공의 세계는 다함이 없고 허공보다 더 넓은 부처님의 진리세계를 혼자서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며 ‘독각(獨覺)’의 불가능성을 설명했다. 스승이 죽으라면 죽겠다는 각오가 대오(大悟)의 씨앗이다. “진리의 동서남북 사유상하(四維上下) 전체를 다 봐야 합니다. 한 모퉁이를 보고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바르게 인도할 수도 없고 점검해 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무사자오(無師自悟)는 천마외도(天魔外道)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스승 없이 깨달았다고 하는 자는 천마이고 외도라는 것이지요.” 길잡이인 스승의 역할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법을 아는 자만이 법을 알려줄 수 있는 법이다. 단독으로 뭔가 해보겠다고 설치는 것은 천하의 마귀이고 정법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이비일 뿐이다. 스승의 가르침 아래 수행하고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수행의 정도를 점검받아야만,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고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간화선에서는 의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신심(信心)이다. 선지식인 스승을 향한 굳은 믿음이다.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신심과 무한한 헌신이 비로소 참된 수행의 출발점이다. 스승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나를 완전히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일단 스승이 내려주는 화두를 마치 신(神)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받들어야 한다. “이 대도(大道)를 배우는 이는 일체의 알음알이를 다 버리고 마음을 텅텅 비워서 선지식의 일언반구를 금쪽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호리(毫釐)의 의심도 없이 부동의 자세로 온전히 믿고 온전히 따라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지어나갈 때 그대로 자기 살림이 됩니다.” 진제 선사의 이러한 당부는 불교의 핵심교리인 무아(無我)와 연결된다. 본래 ‘자아’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데, 중생의 마음은 무명(無明)으로 가려져 있다. 그래서 나의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한다. 이와 같은 가짜 ‘나’에 사로잡혀 생각과 집착과 분별을 일삼는다. 본래 청정하고 고귀한 성품이 무명에 의해 가려져 있으니, 가르침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꾸만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제멋대로 이해한다. 선사는 “스승에 대한 철저하고 헌신적인 믿음이 바탕될 때에만 스승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다”며 “그 회상(會上)에서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이 수행이 되고 가르침이 되어 몸과 마음으로 스며들게 된다.”고 역설한다. 욕심과 편견을 버려야만 비로소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혜안(慧眼)이 열린다. 간화선 수행을 시작할 때도 그런 마음으로 스승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진제 선사는 “선지식 회상에서 바랑을 풀었다면 견성할 때까지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권고했다. 바위처럼 태산처럼, 그 자리에서 뼛골이 사무치는 정진을 해야 한다. 정진이 무르익으면 의정(疑情)이 생긴다. ‘의정’이란 의심의 시간과 노력이 만들어낸 의심의 감정 덩어리와 같다. 의정은 조개가 몸속의 생채기를 필사적으로 치료하다가 생기는 영롱한 진주에 비견할 만하다. 깨달음이란 의심과 신심의 산물이다. 의심이 화두를 겨냥한 것이라면, 신심은 선지식을 흠모함으로 인한 선지식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다. 깨달음이란 스승을 얼마나 믿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셈이다. 진제 선사는 스물네 살 때 김천 도리사에서 첫 철을 났다. 공부인은 무릇 모든 반연(攀緣)을 쉬어야 하고 한화잡담(閑話雜談)을 해서도 안 된다. 쓸데없는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한가롭게 수다 떨지 말라는 뜻이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해 일념 삼매에 푹 빠져야 한다. 진제 선사는 생애 첫 안거에서 이러한 경험을 했다. 흡사 돌사람(石人)과 같고 나무사람(木人)과 같았다. 도리사 선방에서 공부에 애쓰다가 문득 ‘알았다’는 한 생각이 일어났다. 이를 점검받기 위해 전국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대부분이 ‘옳다’, ‘그르다’는 답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상심이 컸다. 스물여섯 살에는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서 동안거를 보냈다. 1960년, 마을과 절집에서의 생활이 모두 어려웠다. 한겨울인데 이불도 없었고, 참선하며 깔고 앉은 좌복을 배에 얹은 채 잠을 청했다. 방에 숭늉을 놔두면 숭늉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 하루는 겨울 날씨가 좀 풀렸다. 진제 선사는 선방 툇마루에 앉아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참으로 견성을 해서 고인(古人)네와 같이 낱낱 법문에 당당한가?’ 스스로 생각해도 아니었다. ‘내가 이 정도 수준을 가지고 견성했다고 한다면, 이는 나를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짓이다. 백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겠다.’ 진제 선사는 이렇게 단단히 발심(發心)하는 와중에 향곡 선사에 대해 듣게 됐다. 법에 관해 물어보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는 어른이라고 했다. 제방 선지식들이 쓰지 못하는 칼을 쓰는 도인이었다. 상원사에서의 동안거가 해제되자마자 바랑을 짊어지고 향곡 선사 회상(會上)을 향했다. 선사는 자신을 찾아온 젊은 수좌에게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라는 새로운 화두를 주었다. 진제 선사는 2년 동안 그 화두와 씨름했다.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버렸다. 바깥출입을 금하고 참구에만 매달렸다. 누가 오든 말든 개의치 않고 안거 결제이건 해제이건 상관하지 않았다. 비로소 2년 만에 ‘향엄상수화’가 해결되었고 문답을 하면 그제서야 입에서 바른 소리가 나왔다. 최종 관문은 ‘일면불 월면불’의 화두였다. 향곡 선사가 준 마지막 숙제로 다시 5년 동안이나 신고(辛苦)를 겪었다. 마침내 이것도 투과해버렸고 역대 조사들과 동일한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향곡 선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기연이다. 바르게 인도할 선지식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스승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야만 나를 온전히 버릴 수 있는 것이다.
· 집필자 : 장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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