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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의 생명은 ‘화두’

‘수행자가 불교의 근본진리를 묻는 질문에 대한 선지식의 대답.’ 진제 선사가 내리는 화두의 정의이다. 선지식(善知識)이란 학덕이 있고 지혜가 높은 선사를 가리킨다.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말이나 행동’이라고 달리 칭할 수도 있다. 진제 선사는 “그 화두를 단박에 알아차리면 언하(言下)에 대오(大悟)할 것”이라며 “만약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참구(參究)해야 하고 그 참구의 대상으로 된 것이 화두”라고 설명했다. 마침내 화두 하나를 제대로 해결하면 1,700공안 모두가 해결된다. “이는 마치 고기 잡는 그물이 한 코가 풀리면 백천(百千) 그물이 다 풀리듯, 한 공안이 타파되면 백천 공안이 다 해결되는 것입니다.” 2022년 11월 24일 부산 해운정사에서 진행된 인터뷰를 통해 직접 전해들은 진제 선사의 화두론(話頭論)은 이러하다. 아울러 염불, 묵조선, 위빠사나 등등 여러 불교수행법이 있으나 선사는 이런 것들로는 깨닫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오직 화두 수행법, 간화선만이 확실한 길이다. 진제 선사는 “화두 수행법은 마음의 고향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요약한다. “화두란 제불 만조사(諸佛萬祖師)께서 심성(心性)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깨달은 귀한 인연, 곧 기연(機緣)입니다. 동시에 깨달으신 안목과 견처(見處)를 만인에게 적나라하게 베풀어 놓으신 법문 중의 법문이고 진리의 본체인 것입니다.” 이처럼 역대 모든 큰스님들은 화두를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깨달음을 자신만의 화두로 또다시 세상 앞에 펼쳐 보였다. 마음속에 화두를 품어야만 출가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고, 화두를 타파해야만 만인의 스승인 선사라고 말할 수 있다. 화두가 수행의 처음이고 끝이다.
부산 해운정사
불교의 근본 사상은 공(空)이고 무아(無我)이고 불이(不二)이다. 이 세상은 본래 비어있고 그러므로 ‘나’도 비어있으며 그 안에 이것과 저것이 엉켜 있다. 이것이 곧 저것이고 저것이 곧 이것이니, 분별하지 않는 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 좋은 것만 추구하고 나쁜 것은 회피하는 그 생각에서부터 번뇌가 시작된다. 좋음과 나쁨은 한 몸이어서 시간이 흐르고 인연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가며 나타난다. 괜히 고진감래이고 전화위복인 것이 아니다. 결국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와 포용이 필요하다. 물론 무분별이란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탐진치(貪嗔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오랫동안 물들고 습관화된 마음은 장기간의 심화 치료가 요구된다. 화두에 깊이 몰입해 마침내 타파해야만 비로소 깨어날 수 있다. 그리고 간화선만이 무분별의 대자유를 가져다준다. 화두를 깨려면 일단 화두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서로 어울려 놀면서 허송세월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필생의 숙적으로 여기고 한데 뒤엉켜 싸워야 한다. ‘저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골몰해야 한다. 간화선의 시작이 화두라면, 간화선의 생명은 의심이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이므로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해야 합니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클수록 깨달음이 크고 의심이 작으면 깨달음도 작은 법이다.” 진제 선사의 일갈(一喝)이다. 누군가 책을 열심히 읽으면 ‘독서삼매경에 빠졌다’고 한다. 불교에서 유래한 관용구다. 삼매(三昧)란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전혀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산스크리트어 ‘사마타(Samata)’를 음역한 것이다. 간화선에도 삼매가 있다. 일념으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면서 화두를 파고들다 보면 삼매에 든다. “화두의 요체는 화두 일념 삼매입니다. 정녕 보는 것도 잊고, 듣는 것도 잊고, 낮이 가는지 밤이 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간이 흘러 흘러 한 달이고 일 년이고 지나다가 어느새 ‘몰록’ 보고 ‘몰록’ 듣는 찰나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오견성(大悟見性)입니다.” 단순히 화두를 쳐다볼 것이 아니라 밀어붙여야 한다. ‘화두를 관(觀)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방법이라는 게 진제 선사의 확언이다. 화두는 관찰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다. 화두를 절대 놓치지 않으면서 의심을 밀고 나가는 것이 화두 참구의 핵심이다. 진제 선사는 “화두 전체를 분명히 챙기고 의심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화두와 의심이 수레의 양 바퀴처럼 항상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령 화두만 있고 의심이 없으면 그냥 생각만 하는 염(念) 화두가 되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반대로 의심만 있고 화두가 없으면 정작 자신이 무엇을 의심하는지 모르는 모호한 의심이어서, ‘뜬구름 잡기’ 식의 무기(無記)에 떨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화두와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간절히 쭉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것이 선사의 지적이다. 그렇게 되면 일부러 반복해서 화두를 챙기지 않아도 된다. 만약 화두가 희미해지고 가물가물해지면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화두를 들어야 한다. 화두가 마치 ‘제 살’인 것처럼 삼아야 한다. 진제 선사는 신체감각을 예로 들었다. “예컨대 바늘로 허벅다리를 찌르면 모든 신경이 집중되듯이, 화두에 간절히 집중해야 합니다. 화두 전체와 의심이 같이 흘러가게끔 챙기고 의심할 것 같으면 혼침 망상이 얼씬도 못합니다.” 화두와 의심의 조합으로 정신이 순일(純一)해지면 참선할 때 잡생각이 전연 나지 않고 졸리지도 않는다. 아울러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한다. 오직 활구만을 화두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활구란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어구이다. 참다운 행복을 얻으려면 분별을 끊어야 한다고 했다. 활구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끊은 채 깨달음의 소식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구절이다. 사량분별을 끊어서 판단하면 활구이고 사량분별로 판단하면 죽은 말인 사구(死句)이다. 짧은 소견이나 그럴듯한 해석으로 접근하면 절대 안 된다는 의미다. “일천성인(一千聖人)의 정액상(頂額上)의 일구(一句)를 투과해야만 활구가 된다.”는 것이 진제 선사의 가르침이다. 간절한 의심으로 정진하다 보면 문득 역대 조사들의 이마와 정수리를 꿰뚫는 활구가 성성하게 빛난다. 활구의 세계를 투과해야만 최고의 진리인 향상구(向上句)의 문이 열린다. 마침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되고, 천불 만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때가 바로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를 보는 견성(見性)의 순간이다. 재차 강조하건대 이것은 간절한 의심만이 열어줄 수 있는 세계이다. “화두를 들고만 있어서도 안 되고 바라보고만 있어서도 안 되고 생각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화두의 생명은 의심이므로 챙기고 의심하고 챙기고 의심해야 합니다. 의심이 크면 깨달음이 크고 의심이 작으면 깨달음도 작고 의심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습니다. 자나 깨나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산책을 하나 일체처 일체시(一切處一切時)에 하루에도 천 번 만 번 화두를 챙겨서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면 인생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도 지리멸렬하고 내일도 몽매할 것이다. 뭔가 다른 길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의심해야만, 새로운 길이 열리는 법이다. 화두란 자기혁신의 기반이고, 의심은 자기혁신의 동력이라 표현할 수 있다.
· 집필자 : 장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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